Discours physique de la parole
말에 관한 자연학적 논고
서문
앞선 여섯 논고들에서 나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수단을 제시하였으며, 그것이 오직 자기 자신 안에서 영혼의 작용들과 신체의 작용들을 분별하는 데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제 타자들을 인식하는 수단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즉 말(la Parole)이다[1]. 나는 가능한 한 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항상 나의 첫 번째 기획을 따르면서, 이 논고에서 언어가 영혼으로부터 얻는 모든 것과 신체로부터 빌려오는 모든 것 사이의 정확한 분별을 행한다.
1. 이 연구를 보다 확실하게 시작하기 위해서, 나는 <여섯째 논고>에서 내 자신 안에서 알게 된 것에만 근거해 추론하며, 마치 내가 아직 나 이외에 다른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확신한 적 없었던 것처럼, 나는 우선 내가 보기에 나의 것과 유사한 모든 신체들이 반드시 나의 영혼과 같은 영혼들과 합일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고찰하는 데서 멈추며, 그것을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만큼 명백한 표지(signes)들을 갖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이 신체들이 행하는 가장 놀라운 것들을 검토하며, 그 원인을 기관들의 배치(disposition)에 귀속시킬 수 있는 한, 이 신체들이 영혼을 갖지 않는다고 확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체들의 특정 부분들의 단순한 배열 안에서 소음, 소리, 목소리의 차이, 그리고 심지어 메어리와 앵무새들이 내뱉는 말들까지도 설명할 근거를 발견한 후에는, 나는 마침내 나의 것과 유사한 모든 신체들 안에서 영혼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이 신체들이 이성을 갖지 않고서는 그토록 적절하게(à propos)[2]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 이어서, 말하기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자신의 사유의 표지들을 주는 것에 다름 아님을 알고서, 나는 이 표지들 중 몇 가지를 관찰한다. 내가 가장 먼저 고찰하는 것들은 눈이나 얼굴의 움직임들, 그리고 신체의 다양한 상태들에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외침들(cris)이다. 나는 그 표지들이 영혼이 신체의 변화를 기회로(à l’occasion) 느끼는 정념들에 자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그래서 영혼이 겪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은 얼굴, 눈, 목소리를 억제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나는 또한 이 방식이 언어들 중 최초의 것이며, 가장 보편적인 것임을 알아차리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민족이 없기 때문이다[3].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인간들의 악의가 이 언어를 모든 것들 중 가장 기만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음을 관찰한다. 영혼의 정념이라는 자연적 표지들 외에도, 나는 오직 설정(institution)에 의한 것들인 다른 표지들을 발견하는데, 이 표지들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이 표지들 중 몇몇의 관계와 차이를 다소 간략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여기에서 내가 연역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며, 그것에 대해 더 정확하고 더 적절하게 말하는 것은 이후에 하기로 유보해두면서, [여기에서는] 어떻게 언어를 발명할 수 있는지, 어떻게 아무도 자신의 언어를 모르는 나라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아이들이 말하기를 배우는지를 고찰하는 데서 멈춘다. 나는 이성이 아이들 안에서 그들로 하여금 각 단어의 의미를 분별하도록 하기 위해 유시(le premier âge, 幼時)부터 기울이는 노력에 감탄하는데, 특히 아이들이 이를 위해 따르는 질서가 내게 놀랍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문법학의 질서와 완전히 유사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이 기술이 얼마나 자연을 모방하는지를 보면서, 나는 우리에게 [문법의] 규칙들을 제시한 이들이 그것들을 아이들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 안에서, 나는 신체와 영혼의 구별(distinction)을 보여주기 위한 너무나도 많은 새로운 논거들을 만나게 되어, 그것[구별]보다 더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보일 정도다.
3. 매우 중요한 어떤 진리에 대한 몇 가지 성찰을 한 후, 나는 말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인식하기 위해, 여기에서 말과 관련하여 신체 측면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을 해명하는 데 전념한다. 나는 말하는 이에게서 공기가 폐로 들어가는 방식을, 왜 공기가 기관(trachée)을 통해 나오면서 소리를 내는지를, 이 통로를 열거나 닫는데 쓰이는 근육들이 소리에 가져오는 다양성을, 입의 어떤 부위들이 소리를 목소리로 맺는데(le terminer en voix[SL1] ) 사용되는지를, 이 상이한 맺음들(terminaisons) 각각에서각 부분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그리고 모든 조음(articulation)에서 목구멍, 혀, 이, 혹은 입술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데, 이것이 내게 신체만을 고찰할 때, 말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게 해준다. 나는 동일한 정확성으로 소리가 듣는 이의 귀와뇌 안에서 산출하는 결과를 관찰한다. 나는 각 동물의 뇌의 다른 부분들 사이의 관계로 인해, 각각의 동물이 상이한 소리에의해 매우 다양하게 자극될 수 있음을 인지하며, 특히 귀에서부터 목소리를 형성하는 데 적합한 모든 부분들로 전달되는 신경들의 용도를 고찰하는 데 멈춤으로써, 나는 예컨대 놀랍게 여겨지는 여러 효과들의 이유를 발견하는데, 예컨대 어떤 새들이 다른 새들의 노래를, 우리 악기들의 소리를, 그리고 때로는 우리 말들 자체를 모방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러하다.
4. 나는 또한 이로부터 짐숭들이 울기 위해서도, 목소리에 의해 움직이기 위해서도, 우리의 말소리를 모방하기 위해서도 영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만약 동일한 종에 속한 것들의 울음이 그 동일한 종들이 서로 가까이 다가가도록배치하고, 다른 종에 속하는 것들을 물러나게 한다면, 그 원인을 오직 그 신체들과 그 기관들의 상이한 구조(construction)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을 확신할 근거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인간들에게서 목소리에 쓰이는 부분들의 운동, 혹은 진동하는 부분들의 운동은 항상 어떤 사유를 수반하며, 말 안에는 항상 두 가지가 있음을, 즉 신체로부터만 올 수 있는 목소리의 형성(formation de la voix)과 거기에 결부되는 의미 혹은 관념—이것은 오직 영혼의 측면에서만 있을 수 있다—을 인지한다.
5. 또한 여기까지 나는 오직 우리의 사유를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들이 공통으로 가지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 문자(écriture), 표지들에 대해 거의 말했을 뿐이며, 비교적 각각의 모든 차이들을 명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나는 여기서 세 종류의 표지, 두 종류의 문자, 그리고 두 종류의 목소리를 관찰한다. 나는 주로 마지막 것에 머무는데, 이와 관련하여 나는 앞선것들의 순서가 나에게 설명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던 것을, 즉 언어를 배울 때 어떤 관념들을 어떤 단어들에 결합하는 것의 쉬움 혹은 어려움에 대해 설명을 끝마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해명하면서, 나는 어떤 이들이 이해하거나 표현하는 데서 갖는 어려움이 영혼의 결함이 아니며, 어떤 다른 이들이 표현하는 데서 갖는 놀라운 유창함(facilité)이 오직 뇌, 그리고 목소리 혹은 신체의 운동에 쓰이는 모든 부분들의 행복한 배치(heureuse disposition)에서만 온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6. 이와 관련하여, 웅변술의 자연학적 원인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웅변이 완벽하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한 사람에게 결코 함께 주어지지는 않는 두 가지 재능을 동시에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그 중] 하나를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기술로써다른 것의 결점을 메울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역은 성립하지 않음을 주목한 후, 나는 오직 원리들만을 설명해야 하는 논고 안에서 허용되는 한에서, 이 결함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들을 교정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나는심지어 도덕학으로 진입하지는 않으면서, 왜 웅변가는 선한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거짓말이 그의 행위의 힘과 멋에서빼앗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수 있는 검토한다.
7. 마지막으로, 웅변이 기질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그리고 웅변이 연습에 의해 얼마나 고쳐질수 있고 완전해질 수 있는지를충분히 고찰하고 나서, 나는 그것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지 않은 정신들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그 정신들이 자신의 사유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탐구하도록 강제하며, 만일 정신들이 신체들과 함께 갖고 있는 긴밀한 합일이 정신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표지들을 사용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면, 우리 정신들은 서로 더 용이하게쉽게 소통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동일한 추론은 나로 하여금 우리가 대화에서 가지는 어려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사람들의 사유를 이해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그 사유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표지들—이것들은 종종그 사유에 적합하지 않다—을 풀어내는 데서 오는 것임을 인식하게 한다. 이로부터 나는 어떤 정신의 사유는 그 정신이 그것을 지각할(apercevoir) 수 있는 순간부터 다른 이에게 명석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 진리는 내가 한껏 논하는 것으로서, 어떤 이들이 오직 신앙에 복종함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쓰인다.
어떤 것들이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를 신앙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잇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항상 신앙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의 정신들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더 밝은 다른 정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신앙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이 한번 우리에게 그 진리를 선언하고 나면, 우리의 이성이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내 주제의 전개가 나로 하여금 여기에서 쓰도록 강제한것들에 대해 약간 반성해봄으로써, 우리가 순수한 정신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신의 감각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감각을 다른 인간들에게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할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탐구에서 더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나, 오직 말에 쓰이는 것을 검토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유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고찰한 후에 마무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말하기(parler)라고불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말에 관해 쓴 논고가 나로 하여금 하도록 만든 반성들이 다른 이들에게도 나에게 그러했던 만큼 즐거운 것이기를 바란다. 나는 그것들이 이번 휴가 동안 나의 모든 온전한 여가가 되어 주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의 일부를 하는 것이 허용되는 만큼, 내가 거기에서 찾은 즐거움은 [앞으로] 내게 허락될 모든 시간을 동일하게 보내도록 나를 추동한다.
마지막으로, 이 주제는 천 가지 기분 좋은(agréable) 사유를 낳기 위해서 그것을 제안하기만 하면 될 정도로 너무도 아름답고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더 재능 있는 모든 이들이 이 논고에서 내가 미처 언급하지 않은 천 가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작품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더 뛰어난 정신을 가질수록,이것을 읽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말에 관한 자연학적 논고
세계 안에서 내가 보는 신체들 가운데, 나는 모든 점에서 나의 것과 유사한 것들을 지각하며, 나는 그것들이 나의 것과 같은영혼들과 합일되어 있다고 믿는 경향(grande inclination)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내 신체가 내 영혼의 작용들과는 구분되는 너무도 많은 작용들을 가지며, 그것을 존속시키는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도 영혼에 의존하지 않는다는것을 고찰하게 될 때, 내가 그 신체들의 모든 작용들을 다 검토하기 전까지는, 나는 적어도 그 신체들이 영혼들과 결합되어있는지를 의심할 여지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지어 양식에 따라서도, 만약 신체들이, 내가 나 자신 안에서 인지한, 신체 혼자만이 원인일 수 있는 것들만을 행한다면, 그 신체들 안에 영혼이 없다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임을 이해한다.
따라서, 내가 대상들이 눈을 통해, 귀를 통해, 코를 통해, 혹은 촉각을 통해 신체 위에 상이한 인상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고, 또 내가 그 신체들이 먹고, 자고, 깨어 있고, 영양을 섭취하고, 호흡하고, 걷고, 죽는 것을 본다 해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신체들 안에 기관들과 부분들의 특정한 질서 외의 다른 것이 있다고 믿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질서는 참으로 경이롭지만, 나머지 물질의 흐름과 배열에 너무 의존적이어서, 나는 내 안에서 그것을 영양, 수면, 호흡, 그리고 그토록 놀라운 방식으로 뇌를 움직이게 하는 대상들이 가진 힘의 유일한 원인으로 인식했다.
내가 어떤 사유들이 내 안에서 내 기관들의 대부분의 운동들을 항상 수반한다는 것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사실인 것은, 내가 내 모든 작용들 안에서 신체의 측면에 속하는 것과 영혼의 측면에 속하는 것을 정확하게 구별한 그 정밀함에 의해, 만약 내가 신체만을 가졌다면 나의 것과 유사한 다른 신체들 안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임을 명백하게 알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신체들을 더 가까이 관찰해야 하고, 혹시라도 그 신체들의 어떤 작용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영혼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를 검토해야 한다. 나는 신체들이 통상적으로 호흡을 통해 혈액 안에서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기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장소들을 향해 이동함을 본다. 나는 신체들이 추위가 운동을 너무 늦출 수 있는 곳들과 열기가 운동을 너무 자극할 수 있는 곳들을 똑같이 피함을 본다. 나는 신체들이 자신들을 파괴할 수 있는 형태와 운동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다른 신체들과의 만남을 자주 힘껏 피하는 것을본다. 나는 또한 그것들이 자신들에게 유용할 수 있는 신체들에 가까이 다가감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작용들이 내가 동일한 작용을 할 때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분별력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내가 다른 성찰들을 통해, 기관들의 배치만이 내 안에서 이 모든 작용들의 원인이었음을 인식했다는 것을 고찰하게될 때, 나는 내 주변의 신체들의 상이한 운동들을 그들의 뇌와 대상들 사이의 관계 외의 다른 원인에 귀속시킨다면, 너무 단언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한다. 그리고 내가 그 신체들이 자신들에게 유용한 것만을, 즉 먹고, 마시고, 서늘함이나 온기를 찾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상태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모든 것만을 행하는 것을 보는 한, 그 신체들 안에 그러한행위에 충분한 기관들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신체들이 자기 자신과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보존과도 관계 없는 일을 하는 것을 자주 보는 것 같다. 나는 그신체들이 마주치면 자신들이 파괴될 것이 분명한 다른 신체들과 맞닥뜨리는 것을 보고, 심지어 그것들이 자신들의 파괴가거의 확실한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먹이를 버리고, 자신들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되어있는 장소를 떠나는 것을 보는데, 이는 나로 하여금 그 신체들이 어떤 경우에는 자기 자신과 전혀 다른 무언가에 의해 이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꽤 합리적으로(raisonnablement) 가정하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 신체들이 자신들을 파괴할 것으로 굳건히 다가서고, 자신들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을 볼 때, 나는 이 결과들을 그 신체들과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계적 비례에 귀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자주 주목했던 것처럼, 어떤 사물들을 향한 내 신체의 경향(pente)과 신체로 하여금 다른 것들을 피하게 만드는 그 [신체] 구조의 힘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럼에도 내 신체의 자연적배치에 반하는 의지들을 가지는데, 이 의지들은 신체가 자신의 기관들의 배치와 대상들이 이 신체에 가하는 힘(effort)만을따를 경우에 [움직였을]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신체를 이동시킨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것과 유사한 모든 신체들의운동이 나의 것과 같은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SL2] 다.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그 신체들의 여러 작용들의 계열을 고찰해볼 때, 나는 그것[나는 나의 것과 유사한 모든 신체들의 운동이 나의 것과 같은 의지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내가매 순간 그들이 내뱉는 것을 들으면서 발견하는 말들 사이의 연결(liaison)은 내게 그 신체들이 사유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내가 순수한 기계도 몇몇 말들을 발화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만, 나는 동시에 바람을 분배하거나 이 목소리들이 나오는 관들을 열리도록 만드는 태엽들이 서로 간에 어떤 질서를 가짐에도, 그것들은결코 그 질서를 바꿀 수 없어서, 결과적으로 첫 번째 목소리가 들리는 즉시, 그것 다음에 오기 마련인 목소리들도 기계에 바람이 부족하지 않은 한 필연적으로 들리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나의 것처럼 만들어진 저 신체들이 내뱉는 것으로내가 듣는 말들은 결코 동일한 계열을 갖지 않는다.
나는 또한 이 말들이 내가 내 생각들을 파악할 수 있을 다른 주체들(sujets)에게 그 생각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말들과 동일한 것들임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신체들 앞에서 말들을 뱉을 때, [내뱉은] 말들이 산출하는 효과에 더주의를 기울일수록, 그것들이 더욱 이해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신체들이 내뱉는 말들이 내 말의 의미에 너무나 완벽하게 상응하여, 어떤 영혼이 그 신체들 안에서도 나의 영혼이 내 안에서 하는 것과 동일한 일을 한다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속을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충분히 고찰했을 때 내게 명백하게 보이는 것만을 내 믿음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나의 저 확고한 결심에 따라, 나는 이 ‘말’(Parole)에 관계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진지하게 성찰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것과 완벽히 유사한 저 모든 신체들이 실제로 나와 같은 인간들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내가 가진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고찰할 가치가 있는 첫 번째 것은, 공기를 밀어냄으로써 소음을 야기할 수 있는 여러 신체들이 있으며, 이 소음은 저 신체들이 서로 다르게 마주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부분들이 서로 다름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효과를 산출하는 신체들 안에 영혼들이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나는 오히려 소음은 오직 공기가 밀려남으로써만생기는 것이므로, 그 원인을 밀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신체에만 합리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음을 안다.
나는 또한 기계학의 도움으로 어떤 신체들이 서로 잘 조립되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들을 구성할 수 있으며, 심지어 내가 때때로 고통이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노래들을 모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또한 바위들과 그와 유사한 신체들이 악기들처럼 소리들(sons)[을 낼]뿐만 아니라, 잘 조음된 말들도 들리게 할 수 있음을 안다. 사실 나는 그 신체들이 이 말들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그것들을 향해 공을 밀었을 때 그것을 밀어낸이에게 되돌려 주듯이, 말들을 발화한 이에게 되돌려줄 뿐임을 안다. 다시 말해, 그 신체들은 그가 자신들을 향해 밀었던 동일한 공기를 그 인상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은 채 그에게 되돌려 보내는데, 이 인상이 아무런 방해도 없을 때 공기로 하여금 말들을 발음된 장소에서 그토록 먼 곳까지 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술은 내가 발화하는 말들과 유사한 말들을 조음하는 기계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기계는 누군가가 그것으로 하여금 발음하도록 계획해 놓은 말들만을 발음할 것이며, 그 기계는그 말들을 항상 같은 순서로 발음할 것임을 안다.
따라서 나는 소음을 내거나, 소리를 만들어내거나, 말들을 발음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유를 가진다고 경솔하게 믿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신체의 구조를 나에게 부여한 그 경탄할 만한 장인(Ouvrier)이 목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부분들을포함한 모든 부분들을 너무나도 기계적으로 배열해 놓았기 때문에, 목소리를 형성하기 위해 내가 영혼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가슴과 횡격막의 근육들의 박동들만으로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갈 수 있으며, 후두연골들의 위치—이 위치는 그 연골들을 움직이는 데 쓰이는 여러 근육들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된다—만으로도, 공기가 그통로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양한 굴절들에 따라, 높거나 낮거나, 부드럽거나 거칠거나, 날카롭거나 약한 수천 가지 소리를 야기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즉, 내가 다양한 말들을 조음한다면, 그것은 목구멍에서 이미 빠져나온 공기가, [196] 내 혀의 근육들이 그 순간 혀를 입의 위쪽이나 아래쪽으로 움직임에 따라 다양하게 자극되기 때문이다. 혹은 공기가 빠져나가려는 순간, 내 이빨이나 입술이 근육들의 운동에 의해 서로 맞닿을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에 따라 공기가 자극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나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즉, 이 모든 부분들을 움직이는 데 쓰이는 근육들 자체는 오직 내 뇌가 자극됨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뇌는 귀의 기관들에 의해 천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극 받을 수 있으며, 나의 영혼은 이 모든 운동들에 있어서, 그 결과들을 지각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다음을 고려해야 한다. 귀의 신경들과 후두의 신경들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소통과 관계가 있어서, 어떤소리가 뇌를 자극하는 즉시, 정기들이 후두의 근육들 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정기들은 근육들을 방금 뇌를 자극한 소리와 완전히 유사한 소리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방식으로 배치한다. 그리고 비록 내가 목구멍 근육들의 이 운동들을 용이하게 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서, 처음으로 뇌를 자극하는 소리들은 목구멍에 의해 쉽게 발화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나는 또한 그 소리들을 반복함으로써, 자주 같은 자리에서 진동하게 된 뇌가 목구멍의 근육에 삽입된 신경을 통해매우 많은 정기들을 보내게 만들 수 있음을, [그리하여] 결국 정기들이 이 작용에 쓰이는 모든 연골들을, 뇌를 진동시킨 소리들과 유사한 소리들을 형성하기 위해 움직여져야 하는 방식대로, 쉽게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음을 잘 이해한다.
따라서 물체들이 소리를 내거나, 목소리를 형성하거나, 혹은 심지어 내가 내 생각을 말하는 데 쓰는 말들과 유사한 말들을조음한다는 것만으로는, 그것들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고 나를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나는 앵무새가 몇 마디 단어를 뱉을 때, 어떤 사유를 가진다고 경솔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주목하는 것은, 앵무새에게 어떤 일정한 순서로 동일한 말들을 엄청나게 많이 반복해준 뒤에도, 앵무새는 언제나 동일한 말들만을 동일한 순서로 낼 뿐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앵무새가 이 반복들을 적절하게 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내가 보기에 앵무새는 인간보다는 언제나 자신에게 말해진 것만을 되돌려줄 뿐인 메아리를 더 닮은 것 같다. 만약 앵무새와 메아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위들은 공기를 되돌려주면서 공기가 받은 인상들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은 채, 자신들을 자극한 바로 그 목소리들을 되돌려주는 반면, 앵무새들은 자신들의 귀를 자극한 목소리와 유사한 다른 목소리를 형성하며, 더이상 반복해서 들려주지 않더라도 종종 그 말들을 반복해낸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국, 바위들이 말들을 돌려보낼 때 내가 바위들이 말한다고 할 수 없듯이, 앵무새들이 말들을 반복할 때, 그들이 말한다고 감히 단언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말한다는것은 귀를 자극한 동일한 말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들에 적절하게 응하여 다른 말들을 발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모든 물체들은, 비록 그것들이 내 말들을 되돌려주는 것을 들을지라도, 다만 내가 그것들을 발화한 순서 그대로만 돌려줄 뿐이므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믿을 이유가 있는 것처럼, 나는 동일한 이유로 앵무새들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앵무새들과 나의 외형과는 매우 다른 수많은 다른 살아있는 물체들에 관한 것을 계속 검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않고, 나는 나와 외형상 너무나도 완벽하게 닮은 것들의 내부를 알기 위해 내게 필요한 탐구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나는 소음, 소리, 목소리, 그리고 말을 일으키는 것에 관해 내가 방금 행한 논의 이후에, 다음을 확실한 원리로서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만약 나와 유사한 신체들이 말을 발음하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 때문에 그것들이 영혼과 결합되어 있는 이점을 가진다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통해, 그들이 나처럼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그것들이 나와 같은 영혼을 가진다고 믿을 확실한 이유를 갖게 될 것이라고 믿겠다.
말이란 무엇인가. 이 검토를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어떤 의심도 남기지 않는 순서로 행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말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내 생각에, 말한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에게 알리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와 닮은 신체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서로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수단은 외적인 기호들(signes extérieures)을 서로에게. 주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신체들과 나 사이에 우리가 서로 이해하는 몇몇 공통적인 기호들(signes communs)있음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신체들이 내 기호들에 대해 다른 기호들—이 기호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에 합치하는 관념들을 나에게 제공한다—로 응답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것들이 내 생각을 이해했다고, 그리고 그것들의 기호들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킨 새로운 생각이 실제로 그것들이 가진 생각이라고 확신할 때 내가 속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는 그들 중 몇몇과, 통상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signifie) 것이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합의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잘 작동한다면, 나와 그것에 관해 합의한 자들만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안다.
이로부터 나는 이 기호들이 설정에 의한 것(d’institution)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 설정은 필연적으로 그에 관해 합의할 수있는 자들에게 이성과 사유가 있음을 전제하므로, 만약 내가 지금 당장 이 신체들이 영혼과 합일되어 있다고 단언한다면, 아마도 나는 어떤 것도 무모하게 주장하지는 않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나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만약 설정에 의한 기호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절대적으로 자연적인 다른 기호들도 인정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SL3] . 예를 들어, 전혀 의도하지 않고도 내 정념들을 드러내는 모든 기호들, 즉웃는 표정이나 슬픈 표정, 그리고 내 눈이나 얼굴의 다른 부분들의 어떤 움직임들은, 내가 거울을 볼 때, 만약 다른 이들이 나를 본다면, 그들은 내 슬픔이나 기쁨 또는 나를 동요시키는 다른 정념들을 알아볼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만일 나의 것과 비슷한 이 신체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이 자연적 기호들이 아마도 그 신체들에게 내 영혼의 다양한 상태들을드러내주는 가장 좋은 수단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이것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나는 이 기호들을 충분히 기만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데, 왜냐하면 내가 실제로 기쁘거나 슬플 때, 나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얼굴과 눈의 움직임들을 억제하는 힘을 가지고있어서, [그 부위들로 하여금] 내가 그것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내버려둔다면 가졌을 표정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할 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나는 내 얼굴, 심지어 내 몸 전체의 어떤 움직임들이 자연적으로 내 생각들 중 어떤것들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이 연결은 그럼에도 아주 필연적이지는 않아서, 내가 때로 그 생각들을 전혀 반대되는 다른 운동들과 결합시키면서 [그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실로 이것이 내게 많은 수고를 요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처음에 가장 어려워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쉬운 습관을 형성할 수 있듯이, 나는 이 변화들을 꽤 쉽게 만들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점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내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에서, 영혼이 신체의 보존을 위해 가지는 기쁨, 슬픔, 욕망, 그리고 두려움과 같은 정념들이 그 신체의 좋거나 나쁜 배치가 뇌 안에서 일으킬 수 있는운동들과 언제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적합하지만(convenable), 그리고 뇌의 부분들이 얼굴, 눈, 그리고 모든 외적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내부는 외부에 표지들이 생기지 않고서는 결코 변화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외적 표지들은뇌의 변화들과만 필연적인 관계를 가지며[SL4] , 신체의 상태만으로도 그[뇌의 변화들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나와 유사한 신체들이 영혼과 합일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내부의 좋거나 나쁜 배치에 따라 내가 종종 내 안에서 지각하는 것과 동일한 눈과 얼굴의 움직임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저 신체들과 내 안에서 너무나도 유사한이 외적 기호들은, 그것 혼자만으로는 저 신체들이 영혼을 가진다는 확실한 논증이 되지 않는다.
또한 얼굴과 눈의 이 움직임들, 그리고 심지어 이 울음소리들—이것들은 아무것도 자신들을 억제하지 않을 때, 신체의 모든부분들 사이의 연결로 인해 신체의 다양한 상태들을 언제나 뒤따르는 것이다—은 신체가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한 자연적 기호(les signes naturels)[SL5] 라고 매우 적절하게 불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신체들의 눈과 얼굴, 그리고 울음소리가 그것들에게 유익하거나 해로울 수 있는 대상들에 의해서만 자극되는 것으로 보일 때, 이 외적 움직임들이 어떤 사유의 기호라고믿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내가 이 물체들이 그것들이 처해 있는 상태와도, 그것들의 보존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기호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볼 때, 또 내가 내 생각들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호들에 그 기호들이 부합하는 것을 볼 때, 그 기호들이 내게 전에 갖고 있지 않았던 관념들을 내게 줄 때, 그리고 그 기호들이 내가 이미 정신 안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가리킬 때(se rapporteront à), 내가 그것들이 나처럼 [사유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점에 관해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수천 가지 유사한 실험을 했으며, 그들의 기호와 내 생각들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호와 나의 기호 사이에서도 너무나 긴밀한 연관을 인식하여, 그것들의 생각을 의심하는 것이 내게는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얼굴의 외적 움직임과 다른 기호들이 정념들을표현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내 능력이 나의 생각들이 그것들이 수반하기 마련인 움직임들과는 전혀 별개임을 깨닫게해준 이유들 중 하나였다면, 이제 나는 나와 닮은 이 신체들이 생각들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의미하는 데 익숙한 움직임들을 그 생각들과 언제나 그토록 긴밀하게 결합하지 않을 수 있어서, 사람들이 항상 그것들[생각들을 의미하는 데 익숙한 움직임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단언할 수 있다. 나는 그 신체들이 자신을 억제하는 기술을 알고 있음을 인식했고, 종종 나와 그것들의 편에서 많은 기호들—이 기호들은 그들이 내 생각을 이해하고, 내가 그들의 생각을 이해한다고 믿게 했다—이 오간 후, 나는 그들이 나를 속이려고 했음을 알아 챘다.
이제 나와 닮은 신체들이 영혼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 말고도 다른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의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나는 말에 관해 아직 알아야 하는 것을 주의 깊게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일반적으로만 다루었고,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유의 기호들을 준다는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런데이 기호들에 관해 내가 한 약간의 성찰이 이미 이토록 중요한 어떤 진리를 나에게 드러내주었고, 또한 나는 이 동일한 기호들이 이 세상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이 사회—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이다—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본다. 따라서 나는 가능한 한 그 기호들의 다양한 종류들을 그 특성들과 함께 고찰하고, 그것들의 모든 경이로움을 발견하여 그것들의모든 유용함을 인식하고자 한다.
이 기호들에 관해 내가 고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주요한 것들 중 하나는, 기호들이 설정에 의해 그것들에 결합되는 생각들과 전혀 일치(conformit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몸짓(gestes)으로, 말(discours)로, 혹은 문자(caractères)—이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들을 알리는 데 쓰는 가장 일반적인 세 가지 종류의 기호들이다—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약간만 성찰한다면) 우리의 생각들을 설명하는 데 쓰이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들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나타내기 위해 고개를 젓고, 그것을 나에게 더 잘 설명하기 위해 말을 형성하려고 목구멍, 혀, 이빨, 입술을 움직이거나, 혹은 종이를 가져다 깃털 펜으로 문자들을 써서 그것을 적을 때, 나는 머리, 입, 혹은 손의 이 모든 움직임들과 그것들이 나에게 알려주는 모든 것사이에 너무나도 적은 유사성(ressenblance)을 보기 때문에, 그것들이 그토록 형편 없이 표현하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이해되는지, 아무리 경탄해도 모자라다.
그러나 내가 이것에서 가장 경탄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기호들과 우리의 생각들 사이에 있는 이 극단적인 차이가, 우리의 신체와 영혼 사이에 있는 차이를 우리에게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것들의 합일의 모든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오직 인간들의 설정으로 인해 외적 움직임들과 우리의 생각들 사이에 놓여지는 이 긴밀한 합일이야말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에게는, 신체와 영혼의 합일이 진정으로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파악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인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만약 인간들이 설정에 의해 어떤 움직임들을 어떤 생각들에 결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연의 창조자(Auteur de la nature)가 인간을 형성하면서, 그의 영혼의 어떤 생각들을 그의 신체의 어떤 움직임들과 너무나도 잘 합일시켜서, 그 움직임들이 신체 안에서 자극되자마자 생각들이 영혼에서 자극되고, 역으로 영혼이 신체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기를 원하는 즉시, 동시에 신체가 움직인다는 것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자연의 창조자가 신체와 영혼 사이에 유지하는 이 너무나도 필연적인[SL6] 연결로부터 생각들을 알리기(communiquer) 위해서 기호들을 만들 필요성이 생겨났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혼은 [무엇이건] 그것을 기회(l’occasion)로 신체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는 생각을 가질 수 없고[=영혼이 어떤 생각을 가질 때, 반드시 그것을기회로 신체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한 영혼은 자신이 생기를 불어 넣는(anime) [SL7] 신체 안에서 자극되는 움직임들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외부에 있는 어떤 관념도 받을 수 없으므로, 두 개의 다른 신체들에 결합된 두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움직임들로, 혹은 원한다면 외적 기호들로 그것들의 생각들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내 생각으로는 내가 기호들의 주요한 차이들, 각각의 특수한 원인,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이유들에 관해 이미 언급한 것에 대해 약간 반성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선, 만약 얼굴의 어떤 움직임들과 어떤 울음소리들이 신체의 모든 부분들 사이의 연결로 인해 자연적으로 신체의 어떤 상태들에 뒤따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얼굴 움직임들과 울음소리들에 자연적으로 결합된 생각들이 신체가 처해 있는 상태를 계기로 영혼이 겪는 정념들이라고 믿어야 한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정념들을 가지고 있는 동안 자신의 눈, 얼굴, 그리고 신체의 모든 외적인 것을 잘 관찰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동일한 움직임들을 보면서 그가 동일한 정념들을느끼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그가 유사한 상태들에서 자신을 억제할 줄 알았다면, 이 기호들을 불신하는 법을 배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이 기호들이 정념들을 표현하는 데 자연적으로 적합하다는 것, 그리고 영혼이겪는 것을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은 얼굴, 눈, 목소리를 억제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이 자신의 생각들을 표현하는 가장 소박한 방식이고, 또한 모든 언어들 중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인 까닭인데, 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민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정념들뿐만 아니라 영혼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다른 수단들이 있다. 즉 보통 말(Parole)이라고 불리는 것과 글쓰기(Écriture)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들은 사실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나서로 다른 문자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관찰하고서, 단어들이나 문자들이 사물들을 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합의했으며,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태에 더 적합한 것에 따라 이 수단들 중 하나 혹은 다른 것으로 자신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서로] 멀리 있었다면, 그려진 후에도 남아있는 문자들이 더 편리했다. 목소리가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옮겨질 수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서로] 바로 앞에 있었다면, 발음된 말들이 더 쉬운 표현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약 누군가가 자유로운 목소리(la voix libre)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문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의 기호들을 눈앞에 드러낼수 있었다. 따라서 쓰기(écrire)와 말하기(parler) 사이에 어떤 진정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말할 때는 목소리를 사용하고쓸 때는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뿐이며, 두 경우 모두에, 우리는 외적이고 신체적인 것들—우리는 설정을 통해 이것들로 하여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도록 만든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기’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면, 사람들이 언어나 글쓰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심지어 그것을 발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언어를 배우든 발명하든, 우리가 하는 것은 어떤 문자들이 어떤 생각을 의미할 것이라고 합의하는 것에불과하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배우는 것과 발명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배울 때는 다른 인간들이 이미 합의한 기호들만을 익히는 반면, 발명할 대는 단어들이나 문자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의미하게 만드는 설정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민족들이 이 수단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들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들을 발명하는 수단들에 대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므로, 나는 한 나라의 언어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는 사람이,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를 모른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 데서 멈추고자 한다.
어떻게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지. 이를 위해 나는 다음을 생각한다. 즉, 먼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의 이름을 알려고하면서, 그는 그 물건들 중 하나를 들고 있거나 그 물건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들을 것이며, 그 물건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자주 반복되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그것의 이름이어야 하므로, 그 단어를 발음하면서 동시에 그것을필요로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어떤 기호를 사용하여 그 물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그에게 올바른 이름을 말해줄 것이다. 따라서 그는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물건들의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지능(esprit)만 있다면, 그는무엇보다도 물건들의 이름을 가리키면서 그 이름을 묻는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을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 물건의 이름에 가장 가까운 답변들에서 발견되는 단어들은 아마도 ‘이것은 ~라고 합니다’(cela s’appelle) 내지 ‘이것은 ~라고 불립니다’(cela se nomme)를 의미할 것이어서, 그는 새로운 질문을 하기 위해 그것들을 반복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방법으로 여러 사물들의 이름을 배운 후, 그는 그 사물들이 유익한지 혹은 해로운지에 따라, 그것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드러내는 사람들이,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들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그는 사물들의 성질들을 의미하는 단어들은 언제나 그 성질들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을 뜻하는 단어들에 덧붙여진다는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올라가기, 내려가기, 가기, 오기 등과 같은 어떤 행동들이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것은 어떻게 부릅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담화(discours)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단어들을 알게 되어 동사들을 명사들에 섞을 수있게 되면, 즉 사물들과 그것들의 행동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면, 단어들과 구문에 있어서 아직 매우 서툴게 말할지라도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배우는 방법.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 여행자들에게 자주일어났을 것임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이들도 태어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마당에, 다자란 성인이 자신이 도착한 나라에서 자신을 이해시킬 수단을 찾지 못하겠는가? 아이들은 세상에 올 때 자연이 모든 인간에게 고통, 기쁨 혹은 다른 정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는 것만을 가지고 온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며, 조금이라도 삶을 경험했다면, 그들은 유모의 얼굴을 너무나도 잘 공부하여, 유모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울리거나 웃게 만들 수있게 된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정념들을 외적 움직임들, 즉 그것들의 자연적 기호들을 통해 쉽게알아챈다.
그들이 사물들을 의미하기 위해 인간들이 설정한 기호들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그러나 어떤 것들에 대한필요가 그것들에 관해 말해지는 모든 것에 너무나도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어서, 누군가 그것들을 손으로 가리키거나 보여줄 때 그들은 결국 그 이름을 배우게 된다. 사실 보통 그것들의 이름을 말해주는 동시에 사물들을 보여줄 때 어떤 정념(가령기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어떤 울음소리를 동반하는 것이 통상적인데, 이것은 아이들을 더 주의깊게 만들고, 이런 식으로[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음으로써 더 잘 기억하게 만든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떤 것들을 가르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정작 가르치려 하지 않았던 수천 가지 다른 것들의 이름을 아이들이 [어느새] 알고 있다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두세 살이 되면 주의력만으로 동일한 사물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는 모든 구문들 속에서 그 사물에 붙여지는 이름을 골라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아이들은 동일한 집중력과 분별력으로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물들의 성질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배운다. 마지막으로 지식을 더욱 넓혀가면서, 이 동일한 사물들의 어떤 행동들이나 움직임들에 주목하고, 동시에 그것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관찰하면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반복되는 말들을 들음으로써, 사물들이나 그 성질들을 의미하는 이름들에 섞여 쓰이는 단어들 중에서 그것들의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들을 골라낸다.
예를 들어, 기질이 활발하고 씩씩한 아이가 전력으로 달리는 말을 보고 따라하려고 한다고 [생각해보자]. 아이를 즐겁게 해주려는 사람들이 아이에게 말이 보이냐고 자주 묻는다. 그런데 아이들은 입술과 잇몸만으로 발음할 수 있는 단어들을 더 잘발음하므로, 아마도 그 단어가 아이가 발음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어서, 사람들은 그에 적합한 이름ㅇ르 붙여준다. 그리고 말에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아이가 그 단어를 대충 발음하고 나면, 사람들은 아이를 그 동물 가까이 데려가 쓰다듬게 해주면서 말이 착하다고 말해준다. 이것이 말이 그렇게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는 동안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말이 어떤 움직임이나숨소리를 내어 아이를 해칠까 두려워지면, 아이를 거기서 데려가려는 사람들은 즉시 말이 나쁘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가안겨가면서 울음소리로 그것이 싫다는 것을 나타내면,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두려운 척하고, 아이는 그들의 얼굴에서그 기호들을 알아채고 즉시 그 감정을 느끼게 되어 말에서 멀어지는 데 동의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쁘다는 단어가아이를 더 주의깊게 만드는 몸짓들과 함께 자주 반복되므로, 아이는 이 새로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기억하여 자기 방식으로 자주 반복한다. 그리하여 이와 유사한 가르침들을 받은 후 이 아이가 말을 보면, 그 동물을 의미하는 단어를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말이 순해서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다면, 말을 의미하는 단어와 온순함을 의미하는 단어를 동시에 말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 너무 날뛰면, 아이는 두려움에 멀어지려 노력하면서 말을 의미하는 단어 다음에, 어떤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로도 이 두 단어를 연결하지 않은 채, 나쁘다는 단어를 자기 방식으로 말할 것이다.
문법학자들이 이 방식을 모방한다는 것. 지나가는 말로 문법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 유사한 관찰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겠다. 그들의 방법의 모든 기술은 자연 자체로부터만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은 아이들이 말하는 법을 배우는 방식을 잘 고찰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들의 가르침이 자연이 아이들에게 주는 것들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것을본다.
우선 문법학자들은 사물들을 의미하는 이름들, 즉 그들이 명사(substantifs)라고 부르는 것들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성질들을 의미하는 것들, 즉 그들이 형용사(adjectifs)라고 부르는 것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이름들을 잘 구별한 후에야비로소, 사물들의 행위들을 의미하는 단어들, 즉 그들이 동사(verbes)라고 부르는 것들을 가르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자연이 아이들에게 주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관찰할 수 있는 바에 따르면, 아이들은 어떤 사물의 이름과 그 사물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드는 성질들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물의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먼저 배우는 것은 언제나 이 적합성(convenance)[사물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드는 성질]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이미 사용하기 시작한 동일한 예로 설명하자면, 내가 말한 아이가 말의 이름과 그것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드는 성질들의 이름을 잘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지식을 넓히려는 욕구가 말을 볼 때마다 말의 행동들을 관찰하게만든다. 그리고 때때로 아이가 자신의 기질의 활발함에 따라 말이 달리는 것을 보며 기쁨의 표시를 보이면, 사람들은 보통기쁨을 수반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그리고 그 동물이 움직이는 방식과 비슷하게 아이를 움직이면서, ‘말이 달린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여러 번 반복되면 그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를 이해하게 되어, 말을 의미하는 단어와 그 행동을 의미하는단어를 반드시 함께 말하게 될 것이다.
동일한 예를 따라가면서 아이가 마침내 완전히 말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는지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 시작을 정확히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나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주목할 것은, 부사들의 가치를 가르치는 데는 사물들, 성질들, 행동들을 의미하는 단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성질들, 혹은 행동들자체보다, 그것들에 덧붙여지는 부사들로 표현되는 더함, 덜함, 과함, 부족함을 아는 것이 아이들의 보존에 그다지 중요하지않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할 만한 것은 아이들이 더함, 덜함, 과함, 부족함을 알아채기 시작할 때, 사물들이 그 성질이나 행동들로 인해 자신들에게 강하게 혹은 약하게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비례해서, 보통 어떤 움직임이나 크고 작음의 몸짓으로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접속사들과 사물들을 연결하거나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른 불변화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은 그것들을 드물게,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용한다. 왜냐하면 순전히 자연을 다르는 아이는 사물과 그 성질을 의미하는 두 단어를 나란히 놓으면 사물과 그 성질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아이는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물의 이름 가까이 놓는 것으로 행동을 표현한다. 아직 시제의 정확성을 구별하거나 동일한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를 다양한 인칭과 다양한 시제에 적용시키는 어미 변화의 다양성, 즉 활용(conjugaison)을 주목하지 못한 채로.
또한 아이가 어떻게 행동의 시제를 알게 되는지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이들이 말하는 법을 배우는 자연적순서로부터 모든 언어들 중 어느 것이 가장 완벽한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할 여지 없이, 일상적인 구문에서 이 자연적 순서를 가장 잘 따르는 언어가 가장 완벽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원리들만을 찾고 있으므로 그 세부사항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 나는 다만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진리를주목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이성이 완전하다는 것을 이 언어 습득 방식이 명백히 드러내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말하는 법을 배우는 이 방식은 너무나도 뛰어난 분별력과 너무나도 완벽한 이성의 결과여서, 그보다 더 경이로운 것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이가 들면서 아이들이 분별없고 거의 이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추론해야 할 모든 주제들과 사안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세상의 모든 지혜를 이루는 세상의 관습들은 잘 질서지어진 자연이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너무나 자주 상반되어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연이 가르치는 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을 배우기 위해 여러 해를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들의 이성이 처음부터완전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난 나라의 언어를 완벽하게 배우며, 심지어 이미 다 자란 사람들이 여행하는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 안에 배우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언어를 알고 외국어도 아는 사람에게서 그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왜 그토록 쉬운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경우 우리는 각 사물의 이름을 쉽게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방법으로 여러 언어들을 배울 수 있다는것도 분명하다. 프랑스어로 어떤 사물을 의미하는 단어를 배운 후, 이탈리아인들, 스페인인들, 그리고 다른 민족들이 그 사물을 어떤 단어들로 표현하는지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여러 단어들이 동일한사물을 의미한다고 합의하고 나면, 우리는 그 사물의 관념이나 생각을 이 단어들 각각에 너무나 잘 결합시켜서, 종종 어떤단어가 사용되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 관념을 얻었다는 것은 매우 잘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각각의 새로운 이야기와 논의된 주제에 관해 말해진 모든 것을 쉽게 기억하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관념들을 주기 위해 사용되었던 단어나 언어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이것은 또한, 내가 보기에, 우리의 생각들과 그것들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단어들 사이의 구별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내가 이 저작에서 제안한 주된 목적이 바로 이 구별을 알리는 것이므로 나는 여기에서 그 구별을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나 명백하게 만들어주는 또 다른 고찰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말하고 서로 다른 민족의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들을 때, 비록 말소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의 말의 의미는 오직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아는 사람들만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만약 생각들이 움직임들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여러 사람들의 뇌가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 즉시 그들 모두가 동시에 동일한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이 점에서 귀와 뇌에 달려 있는 것을 동등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모든 사람들이 이 부분들의 어떤 움직임들이 어떤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의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자신들이 가진 관념들에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이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비록 그것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말들이 그것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귀와 뇌를 자극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귀와 뇌를 자극하지만, 그들은 그것을이해하지 못한다.
동일한 것은 어떤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인식할 수 있다. 그들은 종종 어느 순간에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단어를 잘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타내야 하는 사물의 관념도여전히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단어를 의미하는 단어가 발음되는 즉시 그 관념이 마음에 떠오를 만큼 아직 그 둘을 충분히 잘결합시키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것들이 어떤 의심도 남기지 않을 만큼 충분히 명확한 원리들에 근거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어쩌면 그것들만으로도 몇 가지 다른 결론들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아직 말해야 할 것들과 이미 말한 것들에 대한 완전한 해명을 마련하기 위해, 더 나아가기 전에 말에서 절대적으로 신체에 의존하는 것과 영혼에 의존하는 것을 잘 구별하고, 그것들의 합일로부터 빌려오는 것을 고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목소리가 형성되는가. 목소리를 형성하는 사람의 신체 편에서는 그가 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공기는 가슴 근육들이 움직임으로써 모든 방향으로 넓어질 때, 기관(trachée-artère)을 통해 폐 안으로 들어간다. 이는 마치 풀무의 양쪽을 벌려 늘릴 때 끝 부분으로 공기가 들어가는 것과 같다.
또한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풀무를 닫을 때 나오는 바람이, 바람이 빠져나오는 곳에 다양한 호루라기들을 놓을 수 있는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공기를 밀 수 있듯이, 가슴이 내려앉을 때 폐에서 나오는 공기도 기관의 입구가 다양하게 배치되는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밀린다. 이것을 더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다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공기가 폐로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를 형성하는 막의 양쪽이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막는 데 쓰이는 여러 개의 작은 연골 고리들 외에도, 세 개의 중요한 연골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는 공기가 폐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 그리고 때로는 또한 공기가 매우 부드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그만큼 넓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연골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개구부와 가장 작은 개구부 사이에는 무한히 다양한 다른 개구부들이 있고, 그 각각이 공기에 다른 인상을 만들어내므로, 입에서 나오는 공기가 그토록 다양한 효과들을 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또한 나는 공기를 변화시키는 데 쓰이는 연골이 그것을 열고, 닫고, 심지어 동일한 소리의 지속에 필요한 만큼 어떤 상태들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근육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 근육들은 그것들을 보고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경탄스러운 질서로 배열되어 있다. 다른 두 연골들도 자신들의 근육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이 잘 배치되어 있어서, 어떤 동작들에 쓰이는 작은 근육들의 움직임이 다른 동작들에 쓰이는 근육들의움직임에 의해 방해받는 일 없이, 이 기관의 입구를 올리거나 낮추고, 천천히 또는 빠르게 열거나 닫을 수 있다. 이것은 소리들의 차이가 오직 기관의 이 부분의 배치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만약 이 부분만 있다면 그것이 내는 소리들과 플루트 소리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라는점이다. 즉 막연한 소리들만 낼 뿐, 목소리는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소리들에 어떤 확정성을 주기 위해, 입은 소리들이 그안에서 울려 퍼질 때 입이 열리는 다양한 방식에 따라 다양한 어미(terminaisons)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모음들. 예를 들어 소리를 지를 때 가능한 한 크게 입을 벌리면 A 모음만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특성 때문에 글쓰기에서이 소리의 목소리 혹은 이 소리의 종결을 A라고 부른다.
아래턱을 위턱 쪽으로 약간 내밀면서 입을 조금 덜 벌리면 E로 종결되는 다른 목소리를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턱들을 벌리면서 동시에 입술의 양 끝, 위 아래를 가까이 가져오되 완전히 닫지 않으면 O라는 목소리를 형성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치아를 완전히 붙이지 않고 가까이 하면서, 동시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오면서 완전히 붙이지 않은 채 두 입술을앞으로 내밀면 U라는 막소리를 형성할 것이다.
이 다섯 목소리 각각을 형성할 때 입의 모든 부분들에 주어지는 움직임들을 섞으면, 이 다섯 목소리들 중 두 개 사이의 중간적 종결을 가진 모음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이중모음(Diphtongues)이라고 불리는 이중간 혹은 복합 목소리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굳이 검토하지는 않겠다.
자음들. 그러나 목소리의 다양한 분절을 이루는 이 목소리의 두드림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글쓰기에서는 이것들을 자음(consonnes)이라고 불리는 문자들로 표현한다.
몇몇은 입술만으로 분절된다. 예를 들어 입술이 붙어있고 치아는 붙어있지 않을 때, A 목소리는 입술을 여는 방식으로만 형성할 수 있는데, 이것이 Ba라는 음절을 조음하게 만든다. 소리의 마무리, 즉 목소리를 표현하는 마지막 문자는 모음(voyelle)이라고 불리고, 이 모음이 분절되는 방식을 타나내면서 모음과 함께 울리는 첫 번째 문자는 자음(consonne)이라고 불린다. 이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목소리가 잘 분절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공기를 미는 폐와 기관의 입구가 너무나 좋은 배치 상태에 있어서 목소리가 매우 아름다울 수 있지만, 동일한 사람에게서 입의 다른 부분들이 너무나 나쁘게 배치되어 있어서 충분히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충분한 정확성으로 맞지 않아 목소리가 잘 분절되지 않을수 있기 때문이다.
A 목소리와 함께 B에 대해 말한 것은, 분절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도 없이, 동일한 자음과 다른 목소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있다. 분절은 언제나 입술을 여는 것으로 시작하므로 항상 동일하며, 다양한 종결은 오직 이 다양한 모음들을 형성하기 위해입의 부분들이 놓이는 다양한 위치에서만 받는다.
자음 P와 M도 입술을 오므림으로써 발음된다. 그러나 이 세 자음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B는 입술을 단순히 붙였다가 열면서 발음해야 하고, P는 입술을 조금 더 꽉 오므리고 안으로 당겨서 발음해야 하며, M은 잘 발음하기 위해입술을 더욱 꼬가 오므리고 더욱 안으로 당겨야 한다.
F는 앞선 자음들이 두 입술을 붙여서 형성되는 것과 달리, 아래 입술을 위 치아에 붙일 때 발음된다.
V 자음은 F와 같이 발음되는다, 다만 F의 경우 V 자음보다 치아를 입술에 더 세게 누른다는 차이가 있다.
S는 아래 치아를 위 치아에 충분히 가까이 하고, 혀를 입천장에 충분히 가까이 하여 입에서 나오는 공기가 쉿 소리를 내면서만 지나갈 수 있도록 발음된다. Z는 동일하게 발음되는데, 다만 Z의 경우 공기에 조금 더 공간을 주어 혀를 입천장에 덜 가까이 하고, S를 발음할 때보다 혀를 치아에 더 가까운 방시긍로 펴는 차이만 있다.
D는 혀끝을 위 치아 위에 가까이 가져가서 발음되고, T는 위아래 치아가 만나는 곳에 혀끝으로 두드려서 발음된다. N은 혀끝을 입천장과 위 치아 사이에 닿게 하여 형성된다. R은 혀끝을 입천장 위쪽까지 가져가서, 세게 나오는 공기에 의해 스쳐 밀려났다가 이 발음을 지속하고자 하는 동안 자주 동일한 위치로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발음된다. L은 혀끝을 N이 형성되는 곳과 R이 형성되는 곳 사이에 놓아서 발음된다.
G는 혀의 중간 부분을 입천장의 안쪽 끝 부분에 부드럽게 가까이 가져가서 발음되고, K는 동일한 곳에 조금 더 세게 가져가서 발음된다.
X는 S와 K가 합성된 발음이다. Q도 K와 같이 발음된다.
마지막으로 자음 J는 혀의 중간 부분을 입천장의 안쪽 끝 부분을 향해 G를 A, O, U와 함께 발음할 때보다 덜 세게 가져가서 발음된다. CH는 C 발음에 부드러운 기식음이 합쳐진 것이고, Ga 음절은 거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나오고, Ka 음절은 조금 덜 깊은 곳에서, Ja 음절은 입천장 중간에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Cha 음절은 입천장 중간에서 나온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자음들을 더 잘 발음하는지는 굳이 검토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발음의 용이함이나 어려움은 오직 입의 부분들에서 발견되는 배치(disposition)에서만 온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들의 근육들이 잘 배치되어 있고 다른 부분들의 근육들이 잘못 배열되어 있으면, 좋은 배치 상태에 있는 부분들의 움직임이 필요한 문자들은 잘 발음하고 나쁘게 배치된 부분들의 움직임이 필요한 문자들은 잘못 발음할 것이다.
아이들은 입술이나 몇몇 치아와 혀끝만 필요한 B, P, D와 몇몇 다른 자음들을, 혀의 중간 부분을 사용하거나 R처럼 입천장 위쪽까지 혀를 구부려야 하는 자음들보다 더 잘 발음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뇌의 습기가 혀를 너무 두껍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이 발음할 수 없는 문자들이 있으면 그들이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 관례이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입술과 치아, 혹은 혀끝으로 발음되어 쉬운 자음들로 이루어진 단어들로 가리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물들에게서 소리의 효과들. 소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어떻게 목소리[모음 소리]로 마무리되는지, 그리고 신체 측면만을 고려할 때 소리가 발음하는 사람에 의해 어떻게 음절로 분절되는지를 필요한 만큼 살펴본 후, 이제 소리에 의해 자극 받는 귀 및 소리에 의해 진동된 뇌에서 그것[소리]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검토해야 한다.
귀의 해부학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귀가 귀와 맞닿아 있어서 그 사이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물체들에 의해 밀릴 때, 혹은 딱딱한 물체들에 의해 다시 밀릴 때, 혹은 동물의 폐에서 나오는 물체들에 의해 밀릴 때, 공기를 받아들이도록 배치된 기관이라는 것을 누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나는 그것을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다음을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공기는 무엇에 의해서든 다양하게 진동되면 귀 안으로도 다양하게 들어가며, 이 다양성에 따라 귀 깊숙이 펼쳐진 막과 그것에 연결된 신경들에 다양한 진동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동물들, 심지어 짐승들의 구조에 관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다음을 판단할 수 있다. 귀 신경들의 이 진동이 다를수록 뇌는 다른 부분들에서 진동되어야 하고, 결국 이 [뇌의] 다른 부분들이 진동되는 방식에 따라 정기들이 사지들 속으로 다양하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각 동물, 심지어 각 짐승의 신체 전체의 기계적 배치의 필연적 결과로 일어난다. 어떤 종에 속하는, 즉 어떤 것을 위해 구성된 동물은, 자연의 작자가 그것을 형성하면서 준비해 놓은 모든 것에 맞추어 뇌를 그것의 기질에 따라 잘 조율해놓았다. 그리하여 해로운 대상들이 뇌를 자극하면 언제나 그 대상들로부터 물러서는 데 쓰이는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부분들을 열게 하는 방식으로 자극하고, 유익한 대상들이 뇌를 자극하면 언제나 그 대상들에 다가가는 데 쓰이는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부분들을 열게 하는 방식으로 자극한다.따라서 동일한 소음이 서로 다른 종의 두 짐승들의 귀를 동시에 자극하여 뇌를 진동시킨다고 가정하면, 이 진동이 각각에서 다르게, 그리고 그 소음을 일으키는 것이 그것들에게 유익한지 해로운지에 따라 뇌의 다른 부분들에서 일어날 것이므로, 정기들의 흐름도 이 두 짐승들에서 필연적으로 달라서, 하나는 대상에서 멀리 달아나는 반면 다른 하나는 그것에 다가갈 것이다. 그리하여 늑대의 울부짖음은 양을 달아나게 하면서 동시에 다른 늑대를 다가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동물들의 뇌가 구성된 방식의 정교함이 무한히 다양하고 경탄스럽다 하더라도, 즉 그것들의 다양한 구조에 따라 언제나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역학의 모든 법칙에 [SL8] 따라 자연적으로 좋은 것에는 필연적으로 다가가고 자연적으로 나쁜 것에서는 물러나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작은 뇌 안에는 항상 필수적인 비율(proportion nécessaire)[SL9] 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항상 모든 종류의 대상들에 의해 새겨질 수 있을 정도로 그토록 많은 다양한 장치들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의 뇌는 새로운 인상들을 쉽게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자연적으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때로 상당한 이익이나 해를 끼치는 어떤 대상들이 어떤 부분들에 남기는 인상들을 보존할 만큼 충분히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종종 처음에는 뇌 안에 없었던 이 흔적들이 너무나 잘 새겨져서, 그것들을 일으킨 대상들이 나타나는 즉시 그 인상들을 보존하고 있는 부분들이 다른 부분들보다 더 강하게 진동하여, 그 대상들이 유익했는지 해로웠는지에 따라 동물을 그것들에 가까이 혹은 멀리 옮기는 데 쓰이는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가게 한다.
그 밖에, 동물에게 해로운 대상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유익한 대상들에 다가가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므로, 어떤 대상을 계기로 뇌 안에 아직 아무런 인상도 없을 때, 그 대상이 어떤 소음으로 뇌를 처음 진동시키기 시작하면, 특히 공기가 강하게 움직였거나 뇌에 혼란을 가져다준 방식으로 움직인 경우에는 언제나 달아날 것이다.
이 놀람의 효과를 자기 안에서 종종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그때 신체를 어떤 장소들에 붙들어두려는 의지가, 모든 정기들과 근육들이 소음이 나는 곳에서 신체를 멀리 옮기도록 합력하게 만드는 이 자연적 배치에 의해 얼마나 방해받는지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그 소음이 너무 커서 신체 전체가 거기서 파괴될 것처럼 위협받을 때 더욱 그러하다.
또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평소와 다른 소음이 갑자기 뇌 안에서 만들어내는 진동이,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 소음이 나는 곳에서 신체를 옮기는 데 쓰이는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을 흘러들어가게 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Parole)에서 영혼의 역할을 검토하는 것은 아직 여기서 할 일이 아니므로, 목소리를 형성하는 신체나 목소리의 영향을 받는 신체로부터 말이 빌려오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내가 이미 한 언급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귀에 연결된 동일한 신경들이 치아, 혀, 기관의 입구, 그리고 일반적으로 목소리를 형성하거나 변화시키는 데 쓰이는 모든 부분들로 가는 가지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설정에 따라, 어떤 목소리가 공기 안에서 일으키는 움직임에 의해 뇌가 영향을 받게 하는 귀 신경들의 동일한 진동이, 또한 뇌에서 목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모든 부분들의 신경들 속으로 흘러드는 정기들이, 그 근육들을 목소리가 뇌 안에 남긴 인상에 응하는 방식으로 배치하여, 완전히 유사한 목소리를 형성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귀 신경들과 뇌 사이의 연결이, 공기의 진동들에 의해 자극받을 때 소음의 다양성에 따라 다른 부분들에서 자극받아, 이 다양성에 따라 그 소음이 신체 전체에 유익한지 해로운지의 편에서 신체를 옮길 수 있는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이러한 것이어야 했다면, 귀 신경들과 목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부분들의 신경들 사이에 충분한 연결이 있어서, 목소리가 귀를 자극하는 즉시 이 부분들의 근육들이 그것과 완전히 유사한 목소리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방식으로 배치되도록 하는 것이 그에 못지않게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이 필연성을 더 잘 알리기 위해 두 가지를 성찰해야 한다. 첫 번째는, 동물들에게 어떤 물체들의 소음에 의해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그것들을 피할 수 있도록, 뇌가 진동되는 것이 중요하다면, 보존이나 편의를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멀리 있을 때 그것들을 향해 옮겨갈 수 있도록 다른 어떤 물체들의 소음에 의해서도 뇌가 진동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각 동물을 그 종만을 고려할 때[SL10] , 그것에게 반대 종에 속하는 것들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고, 동종에 속하는 것들보다 더 유익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면, 귀와 목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부분들 사이의 이 소통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수단으로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가 동종의 다른 짐승의 뇌를 진동시키면, 그 짐승은 앞서 말한 바에 따라 울음소리를 낸 짐승을 향해 옮겨갈 뿐만 아니라, 그 목구멍의 근육들도 동시에 완전히 유사한 울음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울음소리가 처음 울음소리를 낸 짐승의 뇌를 자극하면, 필연적으로 두 번째 짐승을 향해 옮기는 데 쓰이는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가서, 그것들이 더 빨리 만나게 되고, 그것들을 가까이 오게 한 울음소리의 원인에 따라 서로에게서 보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나는 귀를 자극한 울음소리나 목소리와 유사한 울음소리나 목소리를 형성해야 하는 이 필연성이 그토록 일반적이어서 항상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짐승들에게서도 다르게 되어야 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첫 번째는 귀가 자극되고 울음소리에 의해 뇌가 진동된 짐승이 그 울음소리를 낸 짐승과 동종이 아닐 때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다른 종의 동물들에서 목소리를 형성하는 부분들의 배치들이 모두 다르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짐승이 동종의 다른 짐승이 내는 것과 유사한 울음소리를 내는 것은 오직 서로 필요할 때 더 빨리 함께할 수 있기 위해서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는, 동종의 짐승들 사이에서도 어떤 짐승의 뇌가 다른 짐승의 목소리나 울음소리에 의해, 그 뇌가 자극받은 짐승에게 정기들이 다른 근육들 속으로 흘러드는 것이 더 유익한 방식으로 자극받는 경우가 종종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탉이 곡식을 발견했을 때 내는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암탉들의 귀를 자극하여 그것들이 곡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게 하는 방식으로 뇌를 진동시키되, 그것들을 그곳으로 옮기게 하는 원인이 된 소리와 유사한 소리를 형성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어떤 짐승이 위험한 대상을 계기로 그토록 크게 울어서 동종의 모든 다른 짐승들을 달아나게 하되 유사한 울음소리를 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짐승이 언제나 정기들의 흐름을 가장 강하게 결정하는 이 긴박한 필요들 속에 있지 않을 때마다, 귀가 울음소리에 의해 자극되는 즉시, 귀와 후두 사이의 이 연결로 인해, 귀 신경들이 뇌 안에서 진동시킨 동일한 부분에서 필연적으로 후두의 근육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가, 뇌의 인상에 응하는 방식으로 근육들을 배치하여, 짐승이 완전히 유사한 울음소리를 내게 된다.
이로부터 새들이 노래하도록 자극받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결국 귀의 신경들과 목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부분들의 신경들의 이 연결이 대부분의 짐승들이 소음을 내는 일반적 원인이다. 긴박한 필요들 속에 있지 않는 한, 귀가 어떤 소음에 의해 자극되는 즉시, 그것이 뇌 안에서 만들어내는 인상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않은 정기들이 유사한 소음을 내도록 후두를 배치하기 위해 후두를 향해 흘러들어가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의 뇌를 진동시킨 소음이 그것들의 목구멍의 자연적 배치에 따라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경우, 그것들은 종종 매우 다른 소음들을 낸다. 그리고 이것이 악기들이 새들을 노래하도록 자극하면서도 그것들이 노래하는 것이 악기들에서 연주되는 것과 그토록 다른 이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악기들을 모방하지 못하는 것이 오직 악기들과 그것들의 목구멍의 배치 사이의 적은 비례 때문임을 알리기 위해, 그것들의 목구멍과 귀를 자극하는 목소리들 사이에 충분한 비례가 있을 때마다 그것들은 반드시 결국 유사한 목소리들을 형성한다는 것을 말해두겠다.
[…]
말은 인간들에게서 그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우리에 관해서는, 목소리의 원인들과 효과들에 관한 한 우리의 신체에 귀속시켜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언제나 그것들에 수반되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영혼의 편에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 우리의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적합한 움직임들과 뇌를 자극하는 다양한 대상들이 신체에 미치는 효과들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왜냐하면 신과 우주의 다른 신체들 사이에 신이 세운 비례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아도 신체를 그 본성에 적합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다고 —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신체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채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소음이 우리 귀의 신경들을 자극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성찰한다면, 우리는 다음을 명백히 인식할 것이다. 귀의 신경들의 이 진동이 뇌 안쪽까지 계속되어 정기들을 자극하고 그것들이 소음의 원인에 가까이 혹은 멀리 우리 신체 전체를 움직이는 데 쓰이는 근육들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것 외에도, 우리 귀나 신체의 다른 부분들의 각각의 진동에 결합된 지각이 언제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종종 이 소음이 우리 신체 안에서 자극하는 움직임들과 전혀 반대되는 의지를 우리 안에서 느낀다. 그리고 비록 이 움직임들의 격렬함이 우리가 그것들을 거의 멈출 수 없을 정도인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것과 매우 다르지 않다면 이 대립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움직임들 외에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이 두 가지 것들 — 즉 귀의 신경들이 진동되는 즉시 우리가 갖는 지각, 그리고 이어서 우리 신체 전체가 자극받는 움직임에 동의하거나 그것을 억제하려는 의지 — 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후자가 우리 신체와 너무나도 명백히 구별되어서, 판단이 너무 성급한 사람들만이 그 구별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목소리가 귀 신경들에서 일으키는 진동을 계기로 우리가 갖는 지각에 관해서는, 비록 그것이 이 진동으로부터 구별하기 조금 더 어렵다 하더라도 — 그것이 언제나 진동에 수반되기 때문에 — 결과들을 그것들의 원인들로 판단하는 데 약간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음을 인식하기 쉽다. 진동은 운동이므로 오직 우리의 신체에만 속할 수 있고, 지각은 사유이므로 오직 우리의 영혼에만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성찰들을 통해, 우리 영혼과 신체의 합일이 오직 어떤 생각들이 어떤 운동들과 너무나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한쪽이 자극되면 다른 쪽도 동시에 자극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 바 있으므로, 우리는 귀의 신경들이 진동할 때마다 우리 영혼 안에 그 신경들이 진동하는 방식에 응하는 감각, 혹은 원한다면 지각도 있다는 것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 진동과 이 지각이 언제나 서로 수반된다 하더라도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소리(son)라고 불리는 것에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공기가 귀의 신경을 자극하면서 뇌를 진동시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뇌의 이 진동을 계기로 우리 영혼이 갖는 감각이다.
전자는 필연적으로 신체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운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필연적으로 영혼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말(parole)에도 두 가지가 있다. 즉 목소리의 형성 — 이것은 내가 말한 모든 것에 따라 오직 신체에서만 올 수 있다 — 과 거기에 결합되는 의미나 관념 — 이것은 오직 영혼의 편에서만 올 수 있다 — 이다.
따라서 말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쓰이는 목소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목소리만큼 쉽게 글쓰기의 문자들이나 어떤 몸짓들에도 의미를 결합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 이 모든 표현 방식들이 말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의미로 취할 때 말하는 방식들이다.
그러나 결국, 목소리가 가장 쉬운 기호이므로 말(Parole)이라는 이름이 목소리에 주어지고, 문자들에는 글쓰기(écriture)라는 이름이, 그리고 다른 표현 방식들에는 이 세 가지 종류에 공통된 유(genre)의 이름인 기호(signe)라는 이름이 남겨졌다.
인간이 서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사용되는 기호들의 차이. 나는 아마도 각각에 대해 그것들을 충분히 구별하게 하기에는 이미 충분히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마도 그것들을 공통점을 통해서만 검토했으므로, 그것들 각각에 대해 따로 말하여 그것들이 서로 다른 점을 주목하게 한다면 쓸모없거나 지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유(genre)의 이름이 남겨진 종, 즉 기호들부터 시작하자면, 그것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을 짧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주목해야 한다. 자연적인 것들이 있고, 일상적(ordinaire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또한 특수적(particulier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자연적 기호들은 영혼의 정념들과 신체의 운동들 사이에 있는 필연적 연결로 인해 영혼의 다양한 상태들을 외부에서 알아보게 하는 것들이다. 나는 이 운동들이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습을 통해 그것들을 억제하거나 마음대로 자극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이 의미해야 하는 것을 언제나 의미한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일상적 기호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데 익숙한 것들로, 이것들은 순전히 제도적인 것들이다. 어떤 것들은 더 보편적이다.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동의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할 것과는 전혀 다른 고개 기호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내보내기 위해 어떤 손 기호들을 만드는데, 이런 종류의 기호들은 꽤 보편적이다. 그러나 존경을 나타내는 기호들은 비록 한 나라 전체에서 보통 동일한 방식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종종 매우 다르다.
내가 특수적 기호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한 민족이나 한 공동체 전체가 합의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나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기를 원하지 않는 어떤 것들을 의미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글쓰기에는 자연적인 것이 없으며, 인간들이 그 비밀을 발견한 것은 오직 기술에 의해서이다. 그들은 몸짓과 목소리에 원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서, 손이 형성할 수 있는 문자들에 의미들을 부여하면 그것들이 우리 자신보다 오래 남아서 우리의 생각들을 멀리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후에 태어날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는 기호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각각이 하나의 사물을 의미하는 문자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너무 많은 문자들을 알아야 하고 너무 많은 의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편했다. 게다가 사물들만 의미될 수 있었고 행동들은 이 방법으로 편리하게 의미될 수 없었다.
그 후 말의 모든 다양성이 오직 목소리들을 형성하거나 분절하는 다양한 방식에서만 온다는 것, 그리고 오직 다섯 개의 모음 소리들만이 다양하게 분절되거나 다양하게 조합되어 모든 말들을 형성한다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 모음 소리들 각각에 문자를 부여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분절들을 표시하기 위한 문자들을 제도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문자들의 조합이 음절들을 만들었고, 음절들이 함께 결합되어 완전한 단어들을 구성했다. 그리하여 이 문자들을 그것들이 나타내는 모음 소리들이나 분절들을 발음하는 순서와 유사한 순서로 배치함으로써 말들을 기억하게 되고, 이 말들이 그것들이 의미하는 사물들을 기억하게 한다. 따라서 글쓰기는 눈에 말하는 수단임을 알 수 있는데, 사실 표현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더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또한 다른 단점이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들을 한 번에 소수의 사람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글쓰기는 거리와 시간을 넘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경이로운 이점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너무나 편리하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 하면서, 결국 인쇄의 비밀을 발견했다. 즉 한번 배열되고 검은색이나 색깔로 칠해지면,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다양한 장소에서 동일한 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음절들을 표시할 수 있는 금속이나 나무 문자들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일반적인 글쓰기 방식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 특수한 암호(chiffres)라고 불리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겠다. 또한 숫자들을 종이 위에 더 일반적으로 숫자(chiffres)라는 이름을 가진 문자들로 표현하는 방식도, 소리들을 음표(notes)라고 불리는 다른 문자들로 표현하는 방식도 설명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목소리로 표현하는 방식 — 주로 말(Parole)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 에 관해서는, 자연적 목소리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 기쁨, 그리고 다른 정념들 속에서 내는 것들처럼. 그러나 자연적 기호들에 대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목소리들을 언제나 믿어서는 안 되며, 종종 그것들을 억제하거나 실제로 느끼지 않는 것을 느낀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인간들이 서로의 생각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른 목소리들이 있다. 어떤 것들은 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한 민족 전체의 언어를 구성하는 것들처럼. 그리고 다른 것들은 자신들의 생각들을 의미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단어들에 합의하는 사람들에게 특수한 것들이다.
나는 이미 태어날 때 말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는지, 새로운 언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를 언급했다.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해 아직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의 습관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여기서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 배우는 언어에서부터 사물의 관념을 단어의 소리에 결합시키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영혼의 편에 속한다. 왜냐하면 소리라고 불리는 감각과 그것이 의미하게 되는 사물의 관념은 우리가 이미 인식한 바와 같이 모두 영혼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체의 편에서는 각각의 목소리가 자극하는 정기들과 뇌의 운동이 있고, 각각의 사물이 뇌에 남기는 인상이 있다. 그런데 이 운동은 언제나 이 인상과 결합되어 있으며, 마치 각각의 소리에 대한 지각이 영혼 안에서 언제나 어떤 특정 사물의 특수한 관념과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따라서 어떤 사물의 관념을 표현하고자 할 때, 그것을 의미하는 목소리의 소리를 동시에 생각한다. 그런 다음 이 관념을 계기로, 그리고 영혼이 뇌를 그것을 형성해야 하는 부분들 속으로 정기들이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배치되기를 원하는 의지를 계기로, 뇌가 그 사물의 인상이 남아있는 부분에서 진동하게 되고, 그로부터 정기들이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는 목소리를 형성하도록 배치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데 쓰이는 부분들의 근육들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이 모든 것들을 결합하는 법을 배웠으므로, 이것이 말하려는 의지에 너무나 바짝 뒤따라서, 이토록 빠르게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단순한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매우 복잡한 기계는 큰 어려움을 동반하여 작동하는 것을 보는 것이 보통이므로, 말하는 데 있는 용이함을 보면서 그를 위해 그토록 많은 장치들이 작동할 필요가 있다고 믿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신체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면서, 그것이 비할 데 없고 모방할 수 없는 장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고찰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더 나아가 만약 우리가 신체와 영혼의 합일이 오직 신이 뇌의 다양한 변화들과 영혼의 다양한 생각들 사이에 놓은 완전한 대응에서만 온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하나가 다른 하나에 그토록 쉽게 작용하고 그것들의 작용들이 신이 그것들의 합일을 지속시키는 동안 언제나 그토록 잘 서로 수반된다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고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들 중 하나이므로, 그것의 모든 어려움들을 풀기 위해 영혼과 신체 사이에는 세 종류의 대응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좋다.
그 밖에 영혼이 사물들에 대해 갖는 관념들과 이 사물들이 뇌 안에 남기는 인상들 사이의 두 번째 대응이 있다. 이 대응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변할 수 없으며,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 신체적 사물들의 인상이 뇌 안에 있지 않고는 그것들의 관념을 결코 갖지 못한다.[SL11]
그러나 각 사물의 이름과 그 관념 사이의 세 번째 대응이 있는데, 이것은 오직 제도적인 것이므로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물에 처음 붙여지는 이름의 소리는 영혼이 이 사물의 관념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감각이고, 더 나아가 이 이름의 인상이 뇌 안에서 사물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분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배우고자 하는 언어에서 그것을 이해하게 될 새로운 단어를 보통 어떤 사물을 처음에 이름 붙였던 단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뇌가 그렇게 배치되어 있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언제나 이미 알고 있던 언어의 단어들에 두 번째 언어의 단어들을 결합시켜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뇌의 배치를 가진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단어의 소리를 그 자체로 사물의 관념에 너무나 쉽게 결합시켜서, 두 단어 중 하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두 단어 모두에 의해 동등하게 표상된다.
따라서 동일한 생각을 여러 기호들과 다양한 언어들의 단어들에 너무나 잘 결합시켜서, 그것들 중 어느 것이든 동등한 용이함으로 사용하여 표현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약간의 이성만 있다면, 처음에 새로운 언어의 단어들을 각 사물의 관념에 결합시키는 데 있는 어려움들로부터, 그것을 이해하게 했던 옛 이름의 관념에 새로운 단어의 관념을 결합시켜야 하는 필연성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배우는 것들을 발음하는 데 있는 어려움으로부터, 말이 많은 것들의 연결에 달려있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나중에 그것이 쉬워진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뇌가 구성된 탁월한 방식과 운동들과 우리의 생각들 사이의 경이로운 대응 때문이다.
[2] 데카르트는 1646년 11월 23일 뉴캐슬에게 보내는 편지(AT IV, 574-576)에서, 오직 말들 및 여타의 표지들이, 어떤 정념에도 관계하지 않고, 제시된 사물들 혹은 주제들에 대해 ‘적절하게’ 행해질 때, 그 말들과 표지들을 검토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신체가 단순히 기계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영혼이 있음을 확신시켜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적절하게’라는 말은 정확하게 말들의 의미 있음 혹은 없음의 성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들을 어떤 대상에 적용함(leur application à quelque objet)을 뜻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앵무새들의 말하기(parler)를 배제하고자 하지만, 광인의 말하기는 배제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르드무아는 이 틀 안에 자리하며, 대답하는 능력과 대화를 이어가는 능력 안에서 다른 정신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확신시켜주는 표지를 본다.
[SL1]terminer가 어떤 뜻인가? terminaison이라는 게 일종의 테크니컬 텀인가?
[SL2]ne explétif로 봐야 말이 될 것 같은데 왜 pas랑 같이 쓰였나. 이런 경우가 있는가?
[SL3]자연기호와 설정 기호
[SL4]내부 변화는 반드시 외부 변화와 연동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뇌의 변화 - 외부 표정의 변화가 연결되어 있을 뿐이기에, 이것이 영혼을 가진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
[SL5]자연적 기호만으로 영혼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SL6]arbitraire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nécessaire하다고 말하지?
[SL7]이런 표현을 써도 될까? forma substantialis를 인정하는 건가?
[SL8]이것이 역학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SL9]이게 뭘까?
[SL10]Cordemoy에게는 espèces의 개념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나? res extensa에서 구별이나 개체화가 어떻게 성립하나?
[SL11]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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