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설정
데카르트 생리학에서 발효는 소화, 혈액 형성, 심장 박동 등 사실상 모든 생리 과정의 핵심 동력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논문은 이 자명해 보이는 사실 뒤에 숨겨진 개념적 긴장을 발굴한다. 데카르트는 발효를 설명하면서 '발효(fermentation)'와'익힘(concoction)' 두 용어를 다른 시기에 사용하는데, 이 용어 선택의 변화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갈레노스주의와 연금술 양쪽 모두와의 복잡한 협상을 반영한다는 것이 Schmechel의 출발점이다.
익힘에서 발효로의 이행
1640년 레기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삼중 익힘'(위·장 → 간 → 심장)이라는 틀로 소화를 설명하며 아직 '익힘'을 사용한다. 그런데 1640년대 후반에 이 틀은 사라진다. 기존 연구는 이를 단순히 비등 이론의 수정으로 보았지만, Schmechel은 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익힘'(pepsis)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영양과 성장을 설명하는 개념으로서 강한 목적론적 함의를 내장하고 있었다. 기계론 철학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에게 이 용어는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따라서 아직 충분히 굳어지지 않아 기계론적으로 전용하기 더 유연한 '발효'로 점차 선회했다는 것이다.
발효 사용의 망설임과 번역 문제
그러나 '발효'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 당시 연금술(특히 판 헬몬트)은 발효를 영적 작용인으로서의 발효소 개념과 결부시켰다. 데카르트는 이 연금술적 함의를 피하려 했기 때문에, 발효라는 용어 자체를 명시적으로 쓰기를 종종 회피했다. 『방법서설』의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포도주의 발효를 가리키면서 단지 cuver(숙성시키다)라고만 쓴다. 논문은 기존 영역본들이 이 자리에 임의로 'ferment'를 삽입해 왔음을 지적하며, '발효소'는 말 그대로 "번역에서 발견된" 용어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맥락에서 râpe(포도줄기)를 'lees(침전물)'로 오역한 기존 번역들도 교정한다. 또한 1638년 플렘피우스가 발효소 개념을 "허구"라고 비판한 데서 데카르트가 충격을 받은 것도, 이후 그가 용어 사용을 더욱 조심스러워한 계기로 읽을 수 있다.
연금술과의 관계
데카르트의 발효 개념이 연금술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기존의 일부 주장에 대해 논문은 세 가지 근거로 반박한다. 첫째, 데카르트는 1630년대부터 '발효' 용어 자체를 꺼렸다. 둘째, 그의 발효는 기하학적·물리적으로 설명되고 열을 중심 동력으로 삼는데, 이는 열을 배제하고 영적 발효소를 핵심으로 삼는 판 헬몬트식 발효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셋째, '빛 없는 불'의 기원은 연금술의 천체적 내재열(태양에서 유래)이 아니라 원소적 열이며, 이는 고대 그리스 이래의 공통 자료(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히포크라테스)에 기원한다. 즉 연금술과의 표면적 유사성은 피상적 용어 차용이거나 공유된 고대 자료에서 비롯한 것이지 직접적 영향이 아니다.
목적론의 재침투
논문의 가장 독창적인 논점이다. 데카르트는 목적론을 생리학에서 제거하려 했지만, 발효 유비를 사용하는 한 이 시도는 절반만 성공한다.
문제는 두 층위에서 발생한다. 첫째, 유비 자체의 목적론이다. 포도→포도주, 건초 더미의 자연 가열 같은 발효 사례들은 단방향적이고 개선적인 변환을 내포한다. 이 유비를 유미즙→혈액의 정화 과정에 적용할 때, 혈액이 유미즙보다 '우월한' 산물이라는 목적론적 방향성이 함께 이입된다.
둘째, 더 근본적으로는 존재론적 확신의 문제다. 데카르트는 인체 내 소화가 단지 발효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발효라고 믿었다. 이 존재론적 확신 때문에 자연계 발효에 내재된 목적론이 그대로 생리학으로 전이된다. 이를 Schmechel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단순 필연성' 개념으로 해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떤 과정들은 목적인보다는 물질의 성질과 동력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특정 방향으로 진행된다. 간의 세공 구조가 유미즙을 혈액으로 정화하는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의 설명이 바로 이 구조와 병행한다는 것이다. Detlefsen이나 Gaukroger 같은 선행 연구들이 이를 '준목적론' 혹은 '명백한 목적지향성'으로 부르며 격을 낮추어 처리한 것과 달리, Schmechel은 이것이 실질적인 자연적 목적론의 재도입임을 주장한다.
결론
결국 데카르트는 '익힘'의 목적론을 피하려 '발효'로 이행했지만, 발효 유비에 내재된 목적론과 생리 과정이 실제로 발효라는 존재론적 확신으로 인해 목적론을 완전히 지우는 데 실패한다. 이 긴장은 용어 선택의 실패가 아니라 기계론 생리학이 일상적 발효 실천에서 유비를 끌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한다. 나아가 이 목적론적 무게는 데카르트 후계자들에 의해 오히려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 하지만 단순 필연성은 결국 Inclination naturelle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데카르트가 이런 기획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 목적론은 ‘결과를 위해 구조가 있다’라는 설명인 반면, 필연성은 ‘구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다’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소화 설명이 겉으로는 기계론적 필연성이지만, 그 결과가 항상 ‘더 완성된 산물’로 향하기 때문에 목적론적 흔적도 남는다고 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데카르트가 deduction anatomique을 사용하고 있다는 캉길렘 식의 주장이 도출된다. 오히려 나는 라파엘 앙드로가 주장했듯이 데카르트가 구조에서 기능을 도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다. 데카르트는 해부학적 구조 기술엥서 기능들을 발견하려는 대신, 알려진 결과들, 즉 기능들에서 출발하여 어떤 원인들이 그것의 발현을 적절히 설명하는지 탐구할 뿐이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의 ‘소화’에서 목적론이 적극적인 형태로 재발견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 그리고 1640년에 레기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효’에 대한 설명이 사라지고, ‘유미즙과의 혼합이 희박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설명이 등장한 것은 최신 해부 기술(유미조의 발견)과 조화시키려는 노력이었지 이게 의도적인 변화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brouill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 Lucian Petrescu, Descartes on the Heartbeat: The Leuven Affair 번역 (0) | 2026.05.02 |
|---|---|
| Ann Wilbur Mackenzie, A word about Descartes’ Mechanistic Conception of Life (1975) 번역 (0) | 2026.04.30 |
| Carmen Schmechel, 소화에서의 발효에 관한 데카르트: 의기계론, 유비, 목적론 번역 (0) | 2026.04.30 |
| "LA LANGUE DES DOCTES": 데카르트 라틴어 저작의 문체와 전략 번역 (0) | 2026.04.29 |
| Raphaële Andrault, La raison des corps 정리 (0) | 2026.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