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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phaële Andrault, La raison des corps 정리

불난집이름 나보코프 2026. 4. 27. 22:17

Raphaële Andrault, La raison des corps 정리

 

[서론. 7-26.] 

1. 메카니즘의 이중적 지위 

메카니즘 = 통로이자 맹점

통로 : 19세기 이래 메카니즘 vs 비탈리즘의 대립이 의학, 생물학 논쟁 전체를 구조화해왔음. 이 대립은 단순한 방법론적 선택이 아니라 더 깊은 인간학적 물음을 담고 있음. 생명체는 무기물처럼 효율 인과성으로 완전히 설명가능한가(메카니즘), 아니면 목적론적으로 방향지어진 고유한 생명력이 있는가(비탈리즘)? 

맹점 : 메카니즘은 논쟁에서 도구로 쓰이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매번 다르게 정의됨. 그 결과, ‘메카니즘이라는 단어 아래 통일된 교설이나 방법론이 없게 됨. 

(1) 로스탕의 경우 : 환원주의를 메카니즘의 특성으로 삼음. 

La vie et ses problèmes에서 제시된 구도. 

메카니즘 = 일원론(생명 현상은 물리, 화학으로 환원된다) 

비탈리즘 = 이원론(생명력은 별도로 존재한다.) 

(2) 캉길렘의 경우 : 메카니즘을 환원주의가 아니라 목적론의 은밀한 반복으로 봄. 

메카니즘은 궁극적으로(in fine) (기관들의 창조자)과 인간 제작자(기계 제작자) 사이의 유비를 전제하며, 이 유비는 기관 발생에서 환원 불가능한 목적론적인 성격을 드러냄. 

(3) 그 외 : 때로 메카니즘은 유체 역동성을 무시하는 경직된 해부학적 구상과 연관되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히 생명체에 대한 수학적 탐구 방법론으로 이해되기도 함. 

>> 결론 : 메카니즘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그 개념의 불확정성 사이에 간격이 남게 됨. 

그럼에도 메카니즘은 자주 실격 판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기관과 기능 사이의 연관, 생명체와 무기물 사이의 관계, 해부학적, 생리학적 탐구 사이의 접합을 사유하기 위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매개로서 요구된다. 

 

2. 역사적 기원 : <백과전서> 기계론자 항목

<백과전서> 기계론자’(mécanicien) 항목은 기계론적 의학의 탄생을 이중 사건의 결과로 제시한다. 

(1) 하비의 혈액 순환 발견

(2) 데카르트 철학의 확산

또한 기계론자들은 고대인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기하학자들의 방법론을 채택했다고 서술한다. , 의학적 메카니즘의 탄생은 17세기 과학혁명의 물리-수학적 혁신과 결합된다. 

항목에 따르면 기계론자들은 동물 경제(économie animale)를 자연의 모든 기계적 법칙에 종속된 운동들의 생산으로 간주하며, 그로부터 신체 = 진정한 기계라는 등식이 나온다. 이 등식은 두 전제에서 나온다. 

(1) 생명체의 기능 : 모든 신체에 공통된 법칙에 종속된 운동들의 효과

(2) 인간 신체 : 상이하게 운동되고 형상 지어진 부분들의 합성체, 그 조립이 효과들의 원인

그리고 기계로 간주된 신체들의 부분들은 사전에 수립된 목적을 위한 결정된 효과들을 생산하기에 적합하다. 

이 역사적-개념적 특성화는 최소 세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1) 두 전제의 관계 : ‘운동 법칙의 적용 부분들의 구조로 기능을 설명이라는 두 테제는 모두 신체-기계 동일시와 결합되지만, 동일한 의학적 실천으로 이끌리지는 않는다. 

전자는 역학 적용형으로, 인공적 운동과 유기적 운동을 동일시한다. 수압기계의 작동 조건으로부터 혈류나 혈관의 너비를 계산하는 식. 기계학 지식을 신체 의학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Pitcairn, Michelotti 등으로 대표됨) 

반면 후자는 해부환원형으로 신체를 분해하여 기관들의 구조를 통해 효과들을 기관 배치로 귀환시킨다. 신체 전체의 종합적 재구성 없이 해부를 통해 작은 도관들과 침샘을 밝히는 식. 신체 전체를 구성 요소들로 환원하는 방향이다. (Sténon으로 대표됨). 

(2) 목적론과의 관계 : 기계적 법칙(효율인과)의 적용과 사전에 수립된 목적(최종인) 사이에는 원리적 긴장이 있다. 기계학과 기하학자들의 방법론은 최종인의 고려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신체를 기계로보는 구상은 동시에 부분들이 사전에 수립된 목적을 위해 배치된다고 말한다. 이 둘이 어떻게 양립하는가? 

(3) 하비와 데카르트의 관계 : <백과전서>는 기계론적 의학의 이중 기원으로 하비와 데카르트를 든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역사적 동시성인지, 아니면 더 본질적인 인식론적 연관인지가 문제다. 단순 이중 권위설을 따르면, 데카르트 철학이 신체를 기계로 볼 것을 권장하고, 혈액순환이 그 가능성의 조건을 제공한다. 본질적 연관설을 따르면 하비의 발견과 데카르트 철학이 동일한 인식론적 구조를 공유한다. 

하비의 De motu cordis(1628)은 기계론적 의학의 세 가지 특징을 사후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1) 고대 권위의 거부 : 엄격한 실험적 방법론과 수치 계산으로 하비는 고대인들의 (a) 정맥혈과 동맥혈의 구분 (b) 혈액이 매 순간 간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에 반박했다. 

(2) 생명체의 이해에 대한 해부학적 방법론의 적용 : 두 심실의 동일한 구조, 정맥 판막들의 관찰을 통해 순환을 증명. 구조로부터 기능을 읽어낸 것. 

, 하비 자신은 심장을 태양에 비유하는 등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를 지니며 신체 전체와 기계 사이의 유비를 전혀 발전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자들은 그 발견에서 기계 유비를 읽어냈다. 혈액의 지속적 순환은 수압기계 유비를, 순환 운동은 신체의 통일성 개념을 지지했다. 그리고 데카르트에게서 생명은 바로 정신들과 혈액의 영속적 운동으로 정의된다. 

 

3. 해부학적 연역

해부학적 연역은 클로드 베르나르가 명명한 것으로, 그는 19세기 실험 생리학 수립 이전 생리학의 지배적 방법을 이 말로 요약하고, 하비에게서 그 전형을 보았다. 

정의 : 기관의 구조(형상)를 관찰하여 중간 항이나 외부 재료 없이 기능을 직접 연역하는 조작. 귀납이 아닌 의미에서의 연역. [여러 사례를 모아 일반화하는 귀납이 아니라, 구조 하나로부터 기능을 단번에, 중간 항 없이 읽어낸다는 의미에서의 연역이다.] 

베르나르는 예로서 하비가 정맥 판막의 형상을 보는 것만으로 혈액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알 수 있었음을 언급한다. 그러나 베르나르 자신도 이 연역이 해부학적 관찰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 하비는 판막을 기술하면서 수문처럼이라는 유비를 사용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수문이라는 인간의 기술적 장치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판막의 형상을 보고 그 기능(역류 방지)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순수하게 구조에서 기능을 연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용도를 구조에 투사한 것. 

따라서 해부학은 발견의 진정한 출발점이 아니다. 구조들로부터 기능들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해부학적 연역은 사실 합리적 재구성에 불과하다. 

캉길렘 : 해부학은 기관들의 기술이고 생리학은 그 기능들의 설명이다. 전자로부터 후자의 규칙들을 연역한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캉길렘은 기술적 유비가 단순한 방법론적 실수가 아니라, 목적론의 도입을 의미한다고 본다. 기관의 구조로부터 기능을 추론할 수 있다고 전제하려면 그 기관이 그 기능을 위해 사전에 설계되었다고 전제해야 한다. 이것은 신이 기관을 제작자가 기계를 만들듯이 만들었다는 전제이다. 이는 갈레노스의 De usu partium 전통과 동일한 목적론적 구조이다. 

따라서 캉길렘에 따르면, 메카니즘은 목적론에 맞선다고 자처했으나, 해부학적 연역을 통해 목적론을 은밀히 반복했을 뿐이다. 17세기 메카니즘이 고대와 단절한 근대적 방법이라는 통념은 사실 알아채지 못한 연속성을 덮고 있다. 메카니즘은 갈레노스 이래의 방법을 반복했다. 과학혁명이 만들어낸 단절의 이미지는 과장된 것이다. 

구조  기능 (해부학적 연역, 메카니즘) : 이것은 환상이다 

기능  구조 (캉길렘의 대안) : 완수해야 할 기능이 기관의 배치를 규율한다. 

따라서 해부학과 생리학 사이의 우선권 관계를 역전시키고, 해부학을 생리학에 종속시켜야 한다. 

 

4. 저자의 물음

위의 분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다음의 네 가지 물음을 제시한다. 

(1) 메카니즘은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해부학적 기술 위에 기능 이해를 근거짓는가?

[메카니즘은 구조를 보면 기능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해부학적 기술(구조 묘사)에서 생리학적 이해(기능 설명)로 넘어가는 논리적 다리가 정확히 무엇인가? 그 다리가 정당한가, 아니면 숨겨진 전제가 있는가?] 

(2) ‘기관 개념 자체가 이미 유기적 구조와 인공 도구 사이의 동일시를 전제하는가? 

[우리가 신체의 한 부분을 기관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 기관을 인간이 만든 도구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하는가?] 

(3) 해부학의 우선성은 유기 신체의 목적론적-의도적 발생을 발견술적 원리로서 함의하는가? 

[구조 먼저, 기능은 나중에 라는 방법론적 순서 자체가 왜 목적론을 끌어들이는가?]

(4) 신체-기계 유비는 신체를 영혼의 도구영혼이 의도적으로 제안하는 목적들의 실현 수단로 간주하도록 권장하는가? 

[신체를 기계로 보는 순간, 신체는 영혼이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가?]

탐구의 궁극적 목표 : 더 일반적인 인식론적 물음. 살아 있는 신체들의 기능 작동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접근과 생명체가 산출되고 스스로를 보존하는 수단들의 배치에 대한 그 고유한 발생적 질서에 따른 이해 사이의 관계. 

 

[40-59] 

데카르트적 유산 : 메카니즘과 해부학적 관찰

기계적 유비와 지식들의 분절 

 

<원리> 4 201, <인간론>, <방법서설> 5부에서 데카르트적 프로그램과 의학적 지식들의 분절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 생명체와 인공 기계 사이의 유비는, 이미 알려져 있고 감각에 명백한 결과들보다 최소한 동등하게 명료하고 명석한 원리들만을 설명적 원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적 방법의 일반적 의도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심장의 가시적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결과보다 더 불분명한 원인, 예컨대 유인 능력을 원용할 수는 없다. 해부학과 역학은 사후적(a posteriori)으로 원인들이 결과보다 더 신비롭거나 더 비물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며, 설명항을 피설명항에 가장 경제적으로 조정하는 것의 가능성과 적절성을 전시한다. 

해부학은 유기적 기능 작용의 이해에 대한 고유한 접근 통로가 되며, 인체 부분들의 기술은 효율인의 탐구에 있어 결정적 단계가 된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는 심장 운동이 심장 안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관들의 단순한 배치, 손가락으로 느낄 수 있는 열기, 경험으로 알 수 있는 혈액의 성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심장 해부학을 상세히 기술한다. 시계 이미지는 여기서 어떤 생명적 현상의 구체적 모델화라기보다는, 생명 기능들의 에티올로지에 대한 경험적, 해부학적 접근의 이념을 일반적으로 옹호하는 방법론적 역할을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가 시각에 대해 하는 것과는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해부학적 세부 사항들에서 그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만을 취한다. 해부학적 세부 사항들에는 설명해야 할 생명적 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배열이 있으며, 따라서 발견의 질서와 진술의 질서에서 해부학의 위치를 구별해야 한다. 자연의 질서를 복원하는 진술의 길은 해부학적 연역에 속하지만, 발명의 길에서는 단순한 해부학적 구조 기술에서 기능들을 발견하려는 대신, 알려진 결과들, 즉 기능들에서 출발하여 어떤 원인들이 그것의 발현을 적절히 설명하는지를 탐구한다. 따라서 <방법서설> 5부에 보고된 해부학적 데이터는 기능들로부터 선택된다. 데카르트는 구조들의 단순한 기술에서 기능들의 전체 발견으로 이어지는 해부학적 연역을 옹호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유기적 구성요소들에 관한 가설들은 해부학이 발명의 출발점이 아니기 때문에 정당하다. 해부학자들이 이미 밝혀낸 구조들이명시적 운동들의 설명에 충분하지 않을 ,  원인들을 가설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며, 단순한 역학적 이유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상 해부학적 진술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인간론』에서처럼, 감각으로   있을 만큼  부분들은 해부학자에게 맡기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그것들에 의존하는 운동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쉽고  명확하게 알게   있다. 이후 경험은 이러한 가설적 원인들이 자연이 실제로 따르는 원인들인지를 확립한다. 그러나 치료법과 관련해서는, 운동들의 그럴듯한 원인들에 머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해부학은 설명항을 피설명항에 가장 경제적으로 조정하는 탁월한 사례이지만, 생명 현상들의 원인들에 대한 유일한 실험적 접근 통로는 아니다. 혈액 순환설명에서 외과의사들의 통상적 경험이 활용되듯이, 인간에 대한 능동적 실험들 역시 정당한 인식론적 지위를 갖는다. [해부학자들이 밝혀낸 구조만으로 운동 설명이 불충분할 때, 보이지 않는 구성요소들에 관한 가설이 정당하게 동원된다  그 가설의 타당성은 이후 경험이 검증한다. 당장 치료적 목적을 위해서는 현상들과 모순되지 않는 그럴듯한 원인으로 충분하다.] 

바로 이 프로그램적 모호성 때문에, 데카르트 수용에서 상반된 두 방향이 동시에 나타난다 : (a) 해부학적 탐구를 적극 장려하는 방향, (b) 가설적 추론으로 해부학을 우회하는 방향.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귀속된 방법들의 이중성은 그의 텍스트들의 프로그램적 차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목적인의 배제와 물리학에 의학을 종속시키려는 일반적 방법론적 요점들은 일관되지만, 해부학과 기능적 설명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서는 어떤 단일하고 일관된 방향도 규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 읽기 : 의학적 지식의 진보에 관한 두 가지 개념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유비는 17세기 후반 의학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독법으로 수용되었다. 

(1) 라 포르주식 독법 : <인간론>을 옹호하면서, 해부학이 인체의 모든 원인을 보여줄 수 없다고 본다. 시계는 내부 톱니바퀴를   있지만, 인체는 감각으로 포착할  없는 무수한 미세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해부학자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없으며, 해부학적 관찰로 입증되지 않은 가설도 정당할  있다.  관점에서 해부학은 기관들의 외부 형태 보여주는  그치고, 기능의 진정한 원인은 동물 정기, 섬유, 유체, 미립자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에 대한 이성적 가설을 통해 설명된다. 그래서 해부학은기능 설명의 원인을 직접 제공하는 학문이라기보다, 기능이 일어나는 장소를 지정해주는 예비적 지식에 가까워진다.

(2) 스테노식 독법 : 스테노는 같은 기계 유비를 정반대로 사용한다. 뇌가 기계라면, 다른 기계를 이해할 때처럼  장치들을 하나씩 분해하고각각이 무엇을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기능에 관한 가설은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기 전에는 중단되어야 한다. 특히  기능, 운동, 감각 같은 동물적 행동들 대해 말하려면 먼저 뇌의 모든 부분을 기술해야 한다. 스테노에게 해부학은 단순한 위치 설정이 아니라, 기능 설명과 치료학의 필수 조건이다. 의사는 기계 수리공처럼 자신이 고치려는 기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모두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라 포르주에게 기계 유비는 보이는 외부와 보이지 않는 내부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여 가설을 정당화하는 장치이다. 반대로 스테노에게 기계 유비는 내부 구조를 끝까지 분해하고 시각화해야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하는 장치이다. 전자는 해부학의 한계를 강조하고, 후자는 해부학의 발견적 우선성을 강조한다.

이 차이는 가시적인 것에 대한 두 개념의 차이이기도 하다. 라 포르주에게 보이지 않는 내부는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계속 벗어나는 영역이며,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거나 가설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스테노에게 보이지 않는 내부는 절대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더 정밀한 해부 기술과 도구를 통해 점차 가시화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실험과 해부의 진보에 따라 계속 이동한다.

이후 뒤베르네, 윈슬로, 라이프니츠, 『백과전서』 등은 대체로 스테노식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기능이나 사용을 말하기 전에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입장을 발전시킨다. 완전한 해부학에 근거하지 않은 기능 설명은 단지 가설일 뿐이며, 치료학의 진보를 위해서도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말브랑슈는 반대로 스테노식 정밀 해부학에 회의적이다. 그는 신체 운동이 기계적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근육 섬유 같은 미세한 구성요소들의 진정한 배치를 해부학으로 모두 밝혀내려는 시도는 불가능하고 무모하며 무용하다고 본다. 그래서 개연적인 가정과 실천적으로 만족스러운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이 부분은 데카르트적 유산이 의학에서 두 방향으로 분기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나는 해부학을 생리학적 과정과 병리의 원인 탐구에서 본질적인 학문으로 격상시키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해부학에서 에티올로지적 가치를 박탈하여, 필요하지만 살아 있는 신체의 미묘한 메커니즘에는 스스로 접근할 수 없는 예비적 학문으로 만드는 방향이다. 각 독법의 헤게모니는 논쟁 상대를 향한 수사적 힘에 비례했을 뿐이며, 하나의 일관된 iatromécaniste 방법론이 존재했다는 통념은 논쟁적 효과의 산물이다.

 

메커니즘의 윤곽 : 정의의 문제 (61-71) 

 기계 유비의 재평가

신체-기계 유비는 데카르트 고유의 발명이 아니다. 데카르트 프로그램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개별 비교들이 아니라, 삼분 영혼론을 배제하고 숨겨진 구조·운동들을 생명 과정의 유일한 원인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시계 이미지는 좁은 의미의 모델이 아니라 분해의 조건과 이점을 전시하는 것이며, 인체는 「최소한(a minima)으로 기계」일 뿐이다. 따라서 어떤 「기계공」도 실제로 옹호하지 않은 상세한 시계-인체 유비의 현실주의를 추측해서는 안 된다.

 환원주의 문제의 복잡성

메커니즘을 환원주의와 단순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다. 환원의 구체적 모습은 어떤 물리적 속성을 인정하느냐, 그리고 연구 프로그램이 과학 발전의 어느 단계에 있느냐에 따라 극도로 달라진다. 데카르트 철학의 현대적 수용은 이 문제에서 어떤 동질성도 보여주지 않으며, 오히려 역학 법칙 적용의 올바른 한계를 둘러싼 인식론적 논쟁의 폭을 드러낸다.

 라이프니츠의 사례

1715년 미켈로티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물리적 설명」(메커니즘이 숨겨져 있지만 역학 원리와 양립 가능한)과 순수한 「역학적 설명」을 구별한다. 그는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복잡한 현상을 per saltum 단순한 최초 원인으로 환원한다고 비판하며, 연속성 원리에 따른 점진적 경험적 분석만이 불가시 원인의 그럴듯함을 보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부학은 이 틀 안에서 유기적 원인의 단순성을 일회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부로 구성의 다양한 수준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분석에 상응해야 한다.

 결론 및 연구 방향

역학적 원인의 정의 자체가 17세기 후반에 극히 가변적이었고, 원칙적 환원주의의 긍정이 의학의 실험적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는 추상적 환원주의 논쟁 대신, 기관들의 정밀하고 연속적인 시각화를 옹호하는 해부학적 방법의 조건과 한계를 역사적 절차에 충실하게 평가하는 작업에 전념하겠다고 예고한다.

 

[이후 「메커니즘의 윤곽 : 정의의 문제」에서 저자는 데카르트적 의학의 핵심이 단순히 신체를 기계로 본다는 표면적 주장에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신체와 기계의 비교 자체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했으며, 데카르트의 독창성은 유기적 현상의 원인을 식물적 영혼이나 목적론이 아니라 숨겨진 물질적 구조와 운동에서 찾으려 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이러한 원인들을 특정한 분석 규모, 예컨대 언제나 미립자 수준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고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계론은 단일한 구체적 모델이라기보다, 생명 현상도 물질적·물리적 원리들에 따라 설명 가능하다는 일반적 방법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 이후 의학에서 메커니즘은 곧바로 단순한 환원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생명 현상이 물리적 과정으로 설명 가능하다는 원칙은 공유되지만, 실제로 어떤 수준에서 어떤 원인들을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예컨대 일부는 모든 기능을 크기·형태·운동 같은 엄격한 미립자적 역학으로 설명하려 하고, 다른 일부는 보다 넓은 물리적 설명, 예를 들어 탄성, 점성, 발효, 유체의 성질 등을 허용한다.

라이프니츠의 경우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데카르트주의자들이 감각 가능한 현상에서 곧바로 가장 단순한 미립자적 원인으로 비약(per saltum)”한다고 비판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원인이 궁극적으로 물리적·역학적 원리와 양립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지, 당장 모든 현상을 단순한 충격과 운동으로 실제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물리적 원인 역학적 원인을 구별하며, 메커니즘을 보다 유연하게 이해한다. 즉 숨겨진 원인이 당장 완전히 가시화되거나 완전히 환원되지 않더라도, 경험과 해부학, 능동적 실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 이 부분의 핵심은, 데카르트 이후 의학적 메커니즘은 단일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이다. 해부학의 역할, 가설의 정당성, 환원의 범위, 실험의 중요성에 따라 다양한 메커니즘들이 존재했으며, “환원주의라는 단일 범주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해부학적 시각화가 절대적 우선성을 가지며, 다른 경우에는 해부학은 단지 출발점이고 가설적·물리적 재구성이 중심이 된다. 따라서 저자는 데카르트적 유산을 이해하려면, 기계론을 단순히 신체-기계 동일시나 기계적 환원주의로 보는 대신, 각 사상가들이 해부학, 실험, 가설, 물리적 설명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데카르트적 메커니즘은 의학 지식의 분절과 진보를 둘러싼 다양한 방법론적 경쟁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고정된 의학 이론이라기보다 여러 상이한 실험적·인식론적 프로그램들을 낳은 문제 설정이었다.]

 

유기적 기능들의 체계적 이론의 빛에서 본 사용들

84-93. 

데카르트도 스테노도 신이 조화로운 배열에 따라 물체들을 창조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연은 헛되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

둘은 경제성의 원리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자연은 항상 가장 쉽고 단순한 수단들로 작동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도 스테노에게도 한편으로는 신이 실제로 원했던 것(목적)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이 그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 즉 효과적/결과적, 물질적 수단들이 있다. 우리 지식이 접근 가능한 것은 후자뿐이다. 

 

Fabrica usus라는 용어는 스테노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이는 르네상스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르네상스 전통은 action ou fonction usage를 구분한다. action ou fonction은 동물 전체 혹은 부분 자체의 보존에 사용되는 말이며, usage는 부분과 관련하여 한 action에 기여하지만 그 자체로 그 action을 실현할 수는 없는 것에 사용되는 말이다. 예컨대, vue(시각)는 눈의 fonction ou action이지만, 수정체는 각막에 빛 줄기들을 모아주는 usage를 가진다. 따라서 usage는 정의상 국소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직접적으로 가장 명백한 커다란 기능들을 갖지는 않는 부분들의 협력을 강조해줄 수 있다. 

 

스테노는 어느 정도 이 정의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럼에도 그는 usu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유산에서 벗어나 있는 근대의 의사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스테노는 usus fabrica,  la structure ou disposition des organes와 함께 사용한다. usus action이나 fonction을 곧바로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구조가 관거닝 되는 움직임에 기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스테노는 function이나 facultas 같이 기관의 목적을 언급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스테노의 이러한 용법을 커민스(1975)의 시스템적 기능 분석과 연결시킨다. 커민스에 따르면 기능 귀속은 어떤 전체가 특정 역량을 산출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에 목적론적 귀속은 없다. 기관의 한 측면은 그것이 전체 앙상블의 어떤 역량 산출에 인과적으로 기여하는 한에서 기능을 갖는다. 이는 기관의 다가성(polyvalence)을 허용하고, 단일한 목적인으로의 환원을 피하게 한다. 이에 따르면 기능은 기관의 목적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의 능력(capacity)이다. 따라서 기능은 기관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 기관의 인과적 기여 방식을 가리키게 된다. 

갈레노스적으로 기능은 기관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 기관의 물질적 특성을 설명해주기 때문에, 기능은 목적인이다. 반면, 커민스의 관점에서 기능들은 주어진 체계의 기능적 분석과 관련하여 이해된다. , 한 체계의 구성 요소가 이런 저런 능력들 중 하나에 대해 수행하는 인과적 기여/인과적 역할일 뿐이다. 하나의 유기체는 순환계, 소화계 등 여러 체계들로 분석가능하고, 그 각 체계들은 다시 기관들과 구조들로 분석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는 동일한 기관에 대해 서로 다른 전체 체계들 속에서 다른 기능 또는 능력을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기능은 더 이상 기관이 왜 존재하는지 설명하는 이유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스테노의 근육학은 이 원리의 구체적 실현이다.)

스테노에게서 usus는 기관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기관의 구조가 특정 운동의 산출에 어떻게 기여하는가의 문제다. 

먼저, 분석의 방향이 역전된다. 전통적으로는 기관의 목적(대기능)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서 구조를 설명했다. 스테노는 반대로, 이미 알려진 전체 운동( : 근육 수축)에서 출발하여, 각 구성 요소의 구조가 그 운동에 어떻게 국소적으로 기여하는지를 분석한다. 따라서 usus는 항상 상대적이다. 특정 효과나 역량의 분석에 종속적으로 귀속되는 것이지, 기관 전체를 정의하는 본질이 아니다. 한 기관은 복수의 usus를 가질 수 있다. 기관의 사용은 다양하고 국소적이며 해부학적 분석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서 usage란 요소들이 그 위치를 바꿔서 근육 수축을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두 가지가 귀결된다. 

(1) Fabrica가 운동의 유일한 작용인이라는 생각이 거부된다. – 근육 운동에는 다른 요소들(신경, 혈액 등)도 기여한다. [근육 구조를 완전히 설명했다고 해서 운동 전체가 설명되는 것이 아님]

(2) Usus가 기관의 유일한 목적인이라는 생각이 거부된다. – 근육은 다른 용도를 가질 수도 있다. [같은 근육이 더 큰 수준에서는 신체 전체 운동의 조건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유기적 효과에도 기여할 수 있음. 한 번의 국소 분석에서 포착된 Usus하나가 이 기관은 이것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식의 목적인이 될 수 없음.] 

 

스테노는 목적론 전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은 헛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반 원칙을 인정한다. 칸트의 표현으로 하자면, 자연에는 목적성처럼 보이는 질서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구조분석을 단일 목적론적 설명으로 환원하려는 등식을 거부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신의 의도 파악, 최종 목적 단정, 기관 생성 이유 완전 설명 등을 하지 않는다. 

 

 

 

(1) 스테노는 usus action ou fonction과 구분한다. 이것은 르네상스 전통의 계승이다. 이때 usus는 국소적, 종속적 기여를 의미하고, action/fonction은 전체 기능을 의미한다. 

(2) 스테노는 usus fabrica와 짝지어 사용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유산과 단절한 근대 의사들의 관행이다. (usus fabrica와 같이 탐구한다는 거 자체가 이미 구조가 전체 목적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어떤 국소적 기여를 하는지 보아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함. usus fabrica랑 같이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국소적 기여에 대한 관심의 표명임.] 

스테노에게 usus는 곧바로 actions, fonctions, grandes facultés, nutritives, vitales ou animales(이것들은 전체의 보존에 기여)를 가리키는 게 아님. 오히려 구조가 관건이 되는 움직임에 기여하는 방식을 가리킴.  

(신체의 "기능" 설명하기 위해 "기관들의 배치" 참조하는 것은, 암묵적인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스콜라적인 영혼 이론을, 그리고 갈레노스가 중시했던 다양한 "능력들" 호소하는 유사-설명들(De naturalibus facultatibus 참고하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와 갈레노스 전통 사이의 대립은 "사용(usage)", "유용성(utilité)", 혹은 "작용(action)" 같은 표현들모두 라틴어 usus 번역한 것으로, De usu partium corporis humani에서 비롯된 갈레노스적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용어보다 "기능(fonctions)"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 = 그니까 갈레노스 전통에서는 fonction이라는  자체는 많이  쓰였나봄. usus 뜻으로 그냥  쓰였다고 보면  . 기능 = 사용 = 목적인)

 

120. 

기계와의 비교는 따라서 신체가 이미 구성된 것으로 주어졌을 때, 그것의 생성을 추상화하면서 그것의 사용들을 탐구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 그것의 발생을 설명하는 척할 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 [각주 3] 우리는 이 책에서 이른바 기계론적 발생 이론들, 즉 후성설(epigenèse)과 전성설(préformationnisme)에 관한 견해들을 검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논쟁들이 이미 충분히 연구되고 주석되어 왔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논쟁들이기계론자들로 간주되는 많은 저자들에게서 실제로 나타나는 발생(genèse)에 관한 사변의 유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대에 전성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대개 하나의 발생 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기체 형성에 관한 적극적인 유전학적 가설의 부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는 배아 성장 문제에 대해 기계론자들이 유전적 설명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기보다, 그러한 설명을 보류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