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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깡길렘, 기계와 유기체(Machine et Organisme), 번역

불난집이름 나보코프 2026. 4. 18. 22:11

조르주 깡길렘, 기계와 유기체(Machine et Organisme) 

 

유기체의 기계론적 이론은 오랫동안 유물론적 생물학자들에게 교의로서 받아들여져 왔으나, 오늘날에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표방하는 생물학자들에 의해 협소하고 불충분한 견해로 간주되고 있다. 이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다시 다룬다는 것은, 철학이 고유한 영역을 갖지 못하며, 사변의 빈한한 친척이자 학자들이 내버린 낡은 옷을 주워 입을 수밖에 없다는 꽤 널리 퍼진 생각을 확인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주제가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생물학의 교리와 방법에 관한 문제로 환원될 때,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철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문제는 심지어 그것을 전유하려는 과학 자체가 여전히 문제적인 그런 종류의 문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기술학(technologie)에 관한 훌륭한 연구들이 이미 존재한다 하더라도, 유기체학(organologie)이라는 개념 자체와 그 방법들은 아직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철학이 뒤늦게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에게 점유해야 할 자리를 가리켜줄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와 유기체의 관계 문제는 일반적으로 일방향으로만 연구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의 항상, 이미 만들어진 기계의 구조와 작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으로부터 기계 자체의 구성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기계론적 철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기계를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였거나, 혹은 그 구성(construction)을 연구할 경우, 인간의 계산, 그들의 입장에서는 학자의 기술(ingénieur)을 끌어들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기계적이라는 용어의 모호성으로 인해 그들은 기계 속에서 응고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 정리들만을 보았는데, 이는 자신의 도달 범위를 의식하고 그 효과를 확신하는 지식의 전적으로 이차적인 구성 작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유기체-기계라는 생물학적 문제를 그것이 해결된 것으로 전제하는 기술과 과학의 관계라는 기술적 문제, 즉 지식의 그 응용에 대한 논리적, 연대기적 선행성의 문제로부터 분리하여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계 구성 현상을 진정한 생물학적 성격의 개념들에 기대어 이해할 수 없으며, 동시에 과학적 현상에 대한 기술적 현상의 독자성이라는 문제를 검토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순서대로 다음을 검토할 것이다. 유기체를 기계에 동화시키는 것의 의미; 기계론과 목적론의 관계; 기계와 유기체 사이의 전통적 관계의 역전; 그리고 이 역전의 철학적 귀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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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한 관찰자에게 있어서, 생명체와 그 형태들은 척추동물을 제외하면 학자들이 이 용어에 부여하는 의미에서의 기계’(mécanisme)라는 개념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치들을 드물게 제시한다. 예컨대, <기술적 사유> (1)에서, 쥘리앵 파코트는 생명 유기체에서 사지의 관절들과 안구의 운동이 수학자들이 기계론(mécanisme)이라 부르는 것에 대응한다고 지적한다. 기계는 인간의 작품인 인공적 구성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 본질적 기능은 기계론들에 의존한다. 기계론이란 운동이 형태를 소멸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고체들의 배치이다. 따라서 기계론은 동일한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주기적으로 복원되는 가변적 부분들의 조립체이다. 조립체는 결정된 자유도(degrés de liberté)를 가진 연결들의 체계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진자의 평형추, 캠이 달린 밸브는 자유도 1을 가지며, 나사산 축의 너트는 2를 가진다. 이 자유도들의 물질적 실현은 안내장치들, 즉 접촉 시 고체들의 운동에 대한 제한들로 이루어진다. 모든 기계에서 운동은 조립체의 함수이며, 기계론은 형태의 함수이다. 루로의 잘 알려진 저작 La Cinématique(1877년 독일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에서 이렇게 이해된 기계론들의 일반 이론의 근본 원리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기계들이 생산하되 창출하지는 않는 운동들은 기하학적이고 측정 가능한 변위들이다. 기계론은 전달 받은 운동을 규제하고 변형한다. 기계론은 동력원이 아니다. 이러한 운동 변환의 가장 단순한 예들 중 하나는 크랭크나 편심 장치 같은 기술적 장치들의 매개를 통해 평행이동의 초기 운동을 회전의 형태로 수집하는 것이다. 물론 기계론들은 중첩이나 합성에 의해 결합될 수 있다. 기본적인 기계론의 형태를 변형하고 기계를 교대로 여러 기계론들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만드는 기계론들을 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자전거의 프리휠 장치처럼 맞물림과 풀림에 의해 작동되는 수정들이 그 경우이다. 

이미 산업에서 규칙인 것이 유기체의 구조에서는 예외이며 자연에서도 예외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인간의 기술들의 역사에서 조립에 의한 형태 구성은 원시적인 사실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도구들은 단일 부품이다. 이미 부싯돌과 손잡이를 조립하여 도끼나 화살을 만드는 것, 그물이나 직물을 만드는 것은 원시적 사실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의 출현은 제4기 말로 본다. 

운동학의 이 기초 개념들을 간략히 상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역설적 문제를 그 모든 역설성 속에서 제기하는 데 쓸모없지 않다. 앞서 정의된 방식으로 정의된 기계들과 기계론들에서의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을 찾았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생명체의 기계론적 모델 표상이 오직 운동학적 유형의 기계론들만을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미 정의된 의미의 기계는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계는 그것이 변형하는 운동을 다른 곳으로부터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는 에너지원과의 결합 속에서만 운동 중인 것으로 표상된다. 

오랫동안 운동학적 기계론들은 인간이나 동물의 근육적 노력으로부터 운동을 받았다. 이 단계에서 생명 운동을 동일한 근육적 노력에 의존하는 기계의 운동에 동화시켜 설명하는 것은 분명 동어반복이었다. 따라서 생명 기능들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은 역사적으로그리고 이 점은 매우 자주 보여진 바 있다자동 인형(automates)의 구성을 전제한다. 그 이름은 동시에 기적적 성격과 인간이나 동물의 근육적 노력의 효과를 즉각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외관상 자체적으로 변환하는 기계론의 충분성이라는 외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매우 잘 알려진 한 텍스트의 독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인체의 물리적 경제를 주의깊게 살펴 보라. 무엇을 발견하는가? 이로 무장된 턱들은 집게 이외에 무엇인가? 위장은 호리병에 불과하다. 정맥, 동맥, 혈관 전체 체계는 수압관들이다. 심장은 용수철이다. 내장기관들은 필터와 체들에 불과하다. 폐는 풀무에 불과하다. 근육은 무엇인가? 끈들이 아니라면. 안각(angle oculaire)은 무엇인가? 활차가 아니라면. 그리고 이하 동일. 화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융합’, ‘승화’, ‘침전이라는 거창한 만들로 자연을 설명하고 그리하여 별도의 철학을 세우게 하라. 이 모든 현상들은 균형의 법칙들, 쐐기의 법칙들, 밧줄의 법칙들, 용수철의 법칙들 그리고 역학의 다른 요소들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이 텍스트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696년에 출판된 Praxis Medica에서 차용한 것으로, 의기계론자(iatromécaniciens) 학파의 이탈리아 의사 바글리비(Baglivi, 1668-1706)가 쓴 것이다. 보렐리가 창설한 이 의기계론자 학파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논쟁의 여지 없이 받았으나, 이탈리아에서는 국가적 위신의 이유로 갈릴레오에게 더 즐겨 귀속시킨다. 

이 텍스트는 쐐기, 밧줄, 용수철을 동일 수준의 설명 원리들로 놓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역학적 관점에서 이 장치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밧줄은 전달 기계론이고, 쐐기는 주어진 운동에 대한 변환 기계론이며, 용수철은 동력원(moteur)이다. 물론 용수철은 빌려준 것을 돌려주는 동력원이지만, 작용하는 순간에는 분명 자율성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글리비의 텍스트에서 심장,  primum movens가 용수철에 동화되고 있다. 거기에 유기체 전체의 동력원이 거주한다. 

따라서 기계론적 설명의 형성을 위해서는, 운동학적 의미의 기계들인 장치들로서의 기계들 곁에, 사용되는 순간 근육 이외의 다른 원천에서 에너지를 끌어내는 동력원 의미의 기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불가결하다. 그리고 바글리비의 이 텍스트가 데카르트를 상기시키더라도, 실제로는 유기체를 기계에 동화시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로 소급시켜야 한다. 동물-기계의 데카르트 이론을 다룰 때, 데카르트가 이 점에서 선구자들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밝히는 것이 다소 어렵다. 데카르트의 선조를 찾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16세기 후반의 스페인 의사 고메스 페레이라(Gomez Pereira)를 인용한다. 페레이라가 데카르트 이전에 동물들은 순수한 기계이며 감각적 영혼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공성기(catapultes) 같은 공성 기계의 구성에서 동물들의 자동적 기계론적 운동에 동화될 수 있는 허가를 발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점도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 사실은 알프레드 에스피나스가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조직 또는 살아있는 기계라는 논문에서 매우 잘 밝혀냈다. 에스피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 Quaestiones mechanicae에서 다루는 문제들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로 동물 운동의 기관들을, 즉 발사체를 던지려는 투석기의 기계 부품들에, 그리고 이 운동의 전개를 해방에 의해 축적된 에너지를 복원할 수 있는 기계들의 그것에 동화시킨다. 투석기는 그 시대의 자동 기계의 전형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저작에서 사지의 운동을 앞서 부여된 의미의 기계론들에 동화시키는데, 이 점에서 <티마이오스>에서 척추 운동을 경첩이나 문짝 축의 운동으로 정의한 플라톤에 충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운동 이론은 데카르트에서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운동의 원리는 영혼이다. 모든 운동은 제1동자를 요구한다. 운동은 부동자를 전제한다. 신체를 움직이는 것은 욕구이며, 욕구를 설명하는 것은 영혼이고, 영혼의 능력을 설명하는 것은 행위(acte)이다. 운동 설명의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나중의 데카르트에서 모두 유기체를 기계에 동화시키는 것은 자동 기계들의 인간에 의한 구성을 전제하며, 이 자동 기계 장치들에서 운동은 에너지원에 연결되어 있고, 그 동력적 효과들은 인간적 혹은 동물적 노력의 중단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전개된다. 복원의 순간과 에너지 축적의 순간 사이의 이 간격, 그리고 기계론이 복원하는 에너지의 저장은 기계론의 효과들과 생명체의 행동 사이의 의존 관계라는 망각을 허용한다. 데카르트가 유기체의 설명을 위해 기계들에서 유사성을 찾을 때, 그는 태엽 자동 기계들, 수력 자동 기계들을 불러들인다. 그는 따라서 지적으로 말해서, 그 시대의 기술 형태들, 시계와 시계의 존재, 물레방아, 분수, 오르간 등에 빚을 진다. 따라서 인간적 혹은 동물적 생명이 기계에 "달라붙는" , 기계에 의한 유기체의 설명은 구상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설명은 인간의 독창성이 유기적 운동을 모방하는 장치들을 구성한 날에야 비로소 구상될 수 있다. 예컨대 발사체의 궤적, 톱의 왕복 운동 등, 그리고 구성과 출발을 제외하면 그 작동이 인간을 거치지 않는 장치들.

방금 두 번에 걸쳐 "구상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설명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데카르트에서, 그 명료함과 심지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게 만드는 거칠음으로, 생물학적 현상들에 대한 기계론적 해석의 출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이론은 분명 서구 사회들의 경제적·정치적 구조의 변형과 연관되어 있지만, 바로 이 연관의 성격이 불분명하다.

이 문제는 P.-M. (Schuhl)이 그의 저서 Machinisme et Philosophie(1)에서 다루었다. 슐은 고대 철학에서 과학과 기술의 대립이 자유인과 예속인의 대립을 포괄하며, 더 심층적으로는 자연과 기예(art)의 대립을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슐은 자연적 운동과 강제적 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대립을 참조한다. 후자는 기계론들에 의해 생성되고 자연에 반하기 위한 것이며, 그 특성은  급속히 소진되는 것, 2° 결코 습관, 즉 자기를 재생하는 영속적 성향을 낳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문명사와 역사철학의 매우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자유인과 예속인, 이론과 실천, 자연과 기예의 위계는 자유 도시에서 시민과 노예의 경제적·정치적 위계에 평행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1)에서 노예는 살아있는 기계라고 말한다. 슐이 단지 암시만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적 과학 존엄성의 개념이 기술 활동의 경멸을 낳고 따라서 어느 의미에서는 발명들의 빈곤과 자연 설명에 기술 활동의 결과들을 전치하는 어려움을 낳는 것인가? 아니면 노예의 풍부함이 군사적 패권과 결합되어 노동 경멸을 낳는 것인가? 이것은 인과 관계의 문제이고, 그렇다면 어느 방향의 인과인가? 아니면 우리는 상호 관계와 영향을 가진 전체적 구조 앞에 있는 것인가? 이데올로기를 경제적 사회 구조로 설명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념의 방향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자연 착취 기술들을 경멸하게 만드는가?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의 어려움이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정당화하도록 강제하는가? 우리는 인과 관계 앞에 있는가, 그리고 어느 방향인가? 아니면 상호 영향을 가진 전체적 구조 앞에 있는가?

유사한 문제가 라베르토니에르 신부의 데카르트 연구(1), 특히 제2권 부록 「데카르트의 자연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제기되는데, 이 부록은 예술가·심미가의 자연학을 기술자·장인의 자연학과 대립시킨다. 라베르토니에르 신부는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데카르트적 혁명은 기술 철학의 차원에서 기독교 혁명을 전제한다. 우선 인간이 물질을 초월하는 존재로 구상되어야 했고, 고려 없이 물질을 착취하는 그의 권리와 의무가 확언되어야 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가치화되어야 자연이 탈가치화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인간들이 근본적이고 원초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구상되어야 했고, 그리하여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정치적 기술이 단죄되고,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 기술의 가능성과 의무가 나타날 수 있었다. 이것이 라베르토니에르 신부로 하여금 데카르트 자연학의 기독교적 기원을 말하게 한다. 신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이의들을 제기한다. 기독교에 의해 가능해진 자연학과 기술은, 요컨대, 기독교 창설 후 오랜 후인 데카르트에게서 나타났다. 더욱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보는 인문주의 철학과, 인문주의자들이 구원의 종교, 피안으로의 도피의 종교로 간주하고 인간적 삶의 이편의 모든 기술적 개선에 대한 경멸의 책임이 있다고 본 기독교 사이에는 안티노미가 없는가? 라베르토니에르 신부는 "시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간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어떤 기술적 발명들이  그리고 이것은 고전적 저작들에서 보여진 바 있는데  말편자, 어깨걸이 멍에처럼 동물의 동력 사용을 변형한 것들이, 노예 해방을 위해 어떤 설교도 달성하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앞서 인과 관계 혹은 전체적 구조라는 두 방향의 해결책으로 풀릴 수 있다고 말했던 문제, 즉 기계론적 철학과 그것이 출현하는 모든 경제적·사회적 조건들의 관계 문제는, 프란츠 보르케나우(Franz Borkenau)가 저서 Der Uebergang vom feudalem zum bürgerlichen Weltbild(1933)에서 인과 관계의 방향으로 해결한다. 저자는 17세기 초부터 기계론적 개념이 고대와 중세의 질적 철학을 가렸다고 주장한다. 이 개념의 성공은 이념의 영역에서 경제적 사실, 즉 매뉴팩처의 조직과 확산을 번역한 것이다. 수공 노동의 분절적·균일하고 비숙련적인 생산 행위들로의 분할이 추상적 사회 노동의 개념을 부과했을 것이다. 단순하고 동일하며 반복되는 운동들로 분해된 노동은 생산 가격과 임금을 계산하기 위한 노동 시간의 비교를 요구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전에는 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과정의 양화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순수한 양적으로서의 노동 계산이 우주의 기계론적 개념의 토대이자 출발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현금"으로 환원함으로써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듯  우주의 기계론적 개념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세계관(Weltanschauung)*일 것이다. 결국 동물-기계 이론의 배후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규범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 갈릴레오, 홉스는 이 경제 혁명의 무의식적 선구자들이 될 것이다.

보르케나우의 이러한 견해들은 헨리크 그로스만(Henryk Grossman)의 한 논문(1)에서 매우 강력하게 제시되고 비판되었다. 그에 따르면, 보르케나우는 기계론적 개념의 출현을 매뉴팩처 시대의 17세기 초로 동시화함으로써 경제사와 이념사 150년을 말살하고 있다. 보르케나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쓴다. 뒤엠의 정역학의 기원(1905)에 관한 연구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필사본의 출판(Herzfeld, 1904 — Gabriel Séailles, 1906 — Péladan, 1907)을 참조하면서, 그로스만은 세아이유와 함께 레오나르도 필사본의 출판이 근대 과학의 기원을 1세기 이상 소급시킨다고 주장한다. 노동 개념의 양화는 우선 수학적이며 그 경제적 양화에 선행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 평가의 규범들은 13세기부터 이탈리아 은행가들에 의해 정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에 기대어, 그로스만은 일반적으로 매뉴팩처에는 엄밀한 의미의 노동 분업이 없었으며, 매뉴팩처는 원래 이전에 분산되어 있던 숙련 장인들을 한 공간에 모은 것이었다고 상기시킨다. 따라서 시간당 생산 가격의 계산이 아니라 기계주의의 발전이 우주의 기계론적 개념의 진정한 원인이다. 기계주의의 발전은 르네상스 시대에 그 기원을 갖는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기계주의적 기술을 의식적으로 합리화했으며, 자본주의 경제의 관행들을 무의식적으로 번역한 것보다 훨씬 더 그러하다. 데카르트에게 역학은 기계들의 이론이며, 이는 우선 과학이 이후 의식적으로 명시적으로 촉진해야 할 자발적인 발명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전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수정하고, 고대인들이 몰랐던 희망을 불러일으켜, 그 정당화, 더 정확히는 그 합리화를 촉구한 기계들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화기(armes à feu), 이것들에 데카르트는 포탄 궤적 문제와의 관련으로만 관심을 가졌다(1). 반면 데카르트는 시계와 태엽 장치, 도르래 기계들, 수력 기계들 등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졌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데카르트가 기계 구성이라는 인간적 현상을 자신의 철학에 통합했으며, 사회적 현상인 자본주의적 생산을 이념으로 전치한 것보다 훨씬 더 그러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유기체를 기계에 동화시키는 것의 내부에서 데카르트 이론에서의 기계론과 목적론의 관계는 어떠한가?

동물-기계 이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불가분하다. 영혼과 신체, 사유와 연장의 근본적 구별은 (1) 철학의 원리 (IV, §§109–113)에서 몇몇 단락들은 데카르트가 화약에도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지만, 그는 동물 유기체에 대한 유사한 설명 원리로서 화약의 폭발 속에서 에너지 원천을 찾지 않았다. 영국 의사 윌리스(Willis, 1621–1675)가 명시적으로 근육 운동 이론을 화승총에서 일어나는 것과의 유비에 기반하여 구성했다. 윌리스는 17세기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직 유효한 방식으로  특히 W. M. 베일리스를 생각할 수 있는데  신경들을 화약 코드들에 비교했다. 신경들은 도화선 코드들의 일종이다. 그것들은 근육 속에서 경련과 강직 현상을 일으킬 불을 전달한다. 의사의 눈에 폭발만이 근육 운동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물질의 형태에 관계없이 물질의 실질적 통일성과 기능에 관계없이 사유의 주장을 함축한다(1). 영혼이 갖는 기능이 오직 판단뿐이므로, 동물들이 판단한다는 어떤 징표도 없고  언어와 발명 능력이 없으니  감각적 영혼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

동물들에 대한 이성의 거부, 즉 동물들에 대한 영혼의 거부는 데카르트에 따르면 생명의 거부를 수반하지 않는다  생명은 오직 심장의 열로만 이루어지니  또한 감각성의 거부도 수반하지 않는다. 감각성은 기관들의 배치에 의존하는 한에서 그러하다(모루스에게 보내는 편지, 1649 2 21)(3). 

같은 편지에서 동물-기계 이론의 도덕적 토대가 나타난다.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를 위해 한 것을 동물을 위해 한다. 그는 동물을 탈가치화하여 인간이 동물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나의 견해는 짐승들에게 잔인한 것만큼이나 인간들에게 경건하다. 인간들을 피타고라스 학파의 미신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미신은 동물들을 먹거나 죽일 때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심에서 인간들을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같은 논증이 역전된 형태로 라이프니츠의 텍스트(콘링에게 보내는 편지, 1678 3 19)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즉 동물 안에서 기계 이상의 것을 보려 한다면, 피타고라스인이 되어 동물에 대한 지배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4). 우리는 (1) "우리 안에는 오직 하나의 영혼만이 있으며, 이 영혼은 그 자체로 어떠한 부분의 다양성도 없다. 감각적인 바로 그 영혼이 이성적이며, 모든 욕구들이 의지들이다." (정념론, 47) (2) 방법서설, 5. 뉴캐슬 후작에게 보내는 편지, 1646 11 23. (3) 감각성과 기관들의 배치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 정도들에 대한 데카르트 이론을 알아야 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섯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 § 9 참조. (4) 이 훌륭한 텍스트는 Mme 프르낭이 출판한 라이프니츠의 선집(Garnier 출판, p. 52)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서구인의 전형적인 태도 앞에 있다. 이론적 관점에서 생명의 기계화와 동물의 기술적 이용은 불가분하다. 인간은 모든 자연적 목적성을 부정하고, 겉보기에 생명적인 자연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체, 인간의 신체까지 포함한 살아있는 기계의 기계론적 모델의 구성을 정당화한다. 왜냐하면 이미 데카르트에서 인간의 신체는, 인간 자체는 아닐지언정, 기계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기계론적 모델을 이미 말한 바 있듯 자동 기계들, 즉 움직이는 기계들에서 찾는다(1).

데카르트 이론에 그 온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인간론 서두를 읽고자 한다. 이 저작은 라틴어 필사본에 기초하여 라이든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프랑스어로는 1664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인간들은, 데카르트가 말하듯, 우리처럼 영혼과 신체로 구성될 것이며, 나는 먼저 신체를 따로, 다음으로 영혼을 또 따로 기술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이 두 본성이 어떻게 결합되고 통일되어 우리와 닮은 인간들을 구성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신체가 신이 우리와 최대한 닮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형성한 흙으로 만든 조각상 또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가정한다. 그리하여 신은 외부에 우리 사지의 색깔과 형태를 줄 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신체가 걷고, 먹고, 숨 쉬고, 마침내 기관들의 배치에 의존하고 물질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상상될 수 있는 우리의 기능들 모두를 모방하는 데 필요한 모든 부품들을 넣는다. 우리는 단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뿐인 시계들, 인공 분수들, 물레방아들 그리고 유사한 기계들이 여러 방식으로 스스로 움직이는 형태를 갖는 것을 보며, 나는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에서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운동들을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기계들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교를 신에게 귀속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된다."

이 텍스트를 가능한 한 순박한 정신으로 읽으면, 동물-기계 이론은 두 가지 전제의 진술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전제를 사람들은 너무 자주 무시한다. 첫 번째는 제작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생명체가 기계 구성에 논리적으로도 연대기적으로도 선행하는 것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물-기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논리적·연대기적 의미 모두에서 신에 의한 효력인으로서, 그리고 모방해야 할 선재하는 생명체에 의한 형상인이자 목적인으로서 선행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동물-기계 이론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과성 개념과의 단절을 보는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용하는 모든 인과성의 유형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동일한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겠다. 

살아있는 기계의 구성은, 이 텍스트를 잘 읽는다면, 미리 주어진 유기적 원형을 모방해야 할 의무를 함축한다. 기계론적 모델의 구성은 생명적 원본을 전제하고, 결국 데카르트가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까운지를 물을 수 있다. 플라톤적 데미우르고스는 이념들의 복사본을 만든다. 이념이 그 자연적 대상이 복사본인 모델이다. 데카르트적 신, Artifex Maximus는 생명체 자체와 동등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생명-기계의 모델은 생명체 자체이다. 신적 기예가 모방하는 생명체의 이념은 생명체이다. 그리고 마치 규칙적 다각형이 원에 내접하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결론짓기 위해 무한으로의 이행이 필요한 것처럼, 기계론적 기교 또한 생명에 내접하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결론짓기 위해 무한으로의 이행, 즉 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텍스트 말미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 안에서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운동들을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되지 않으며, 기계들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교를 신에게 귀속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동물-기계 이론은 기하학에서 공리론이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 그것이 표상해야 할 것의 존재와 생산의 논리적 선행성을 오직 허구에 의해서만 무시하는 합리적 재구성이다.

데카르트 이론의 이 측면은 당대의 한 해부학자, 유명한 스테노(Sténon) 1665년 파리에서 행한 뇌 해부학 강연에서   인간론 출판1년 후  잘 간파했다. 스테노는 데카르트에게 더욱 주목할 만한 경의를 표하면서도  해부학자들이 데카르트가 가르친 해부학에 항상 관대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인간은 데카르트에 의해 신의 보호 아래 재구성된 인간이지 해부학자의 인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1). 따라서 기계론을 유기체에 대체함으로써, 데카르트는 생명의 목적론을 사라지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만 사라지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출발점에 모아놓기 때문이다. 해부학적 형태에서 역동적 형성으로의 대체가 있지만, 이 형태는 생산 기술의 산물인 한, 모든 목적론이 생산 기술 안에 갇혀 있다.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을 대립시킬 수 없는 것 같다. 기계론과 의인론(anthropomorphisme)을 대립시킬 수도 없다. 기계의 작동이 순수한 인과 관계에 의해 설명되더라도, 기계의 구성은 목적성 없이도 인간 없이도 이해되지 않는다. 기계는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얻어야 할 일정한 목적들의 관점에서, 결과들의 형태로 만들어진다(2).

따라서 데카르트에서 생명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려는 기획에서 긍정적인 것은 목적론을 그 의인론적 측면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다만 이 기획의 실현에서 하나의 의인론이 다른 것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적 의인론이 정치적 의인론을 대체한다.

1648년에 쓴 소론 인체의 묘사에서 데카르트는 인간에서의 수의 운동 설명에 접근하고, 19세기까지 자동 운동과 반사 운동의 이론 전체를 지배한 사실, 즉 신체가 오직 신체가 먼저 기계론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조건에서만 영혼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명료함으로 정식화한다. 영혼의 결정은 신체 운동의 충분 조건이 아니다. "영혼은, 데카르트가 말하듯, 그 운동에 필요한 모든 신체 기관들이 잘 배치되어 있지 않은 한 신체에서 어떠한 운동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신체가 어떤 운동을 위한 모든 기관들을 갖추고 있을 때, 신체는 영혼 없이도 그것들을 산출하기 위해 영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영혼이 신체를 움직일 때, 그것이 민중적 표상에 따라 신하들이나 병사들에게 명령하는 왕이나 장군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신체를 시계 기계론에 동화시킴으로써, 그는 기관들의 운동이 맞물린 톱니바퀴들처럼 서로를 명령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에서는, 명령이라는 정치적 이미지, 말이나 신호에 의한 인과성이라는 마술적 인과성 유형이, "명령"이라는 기술적 이미지, 기계론적 배치나 연결 체계에 의한 긍정적 인과성 유형으로 대체된다.

데카르트는 클로드 베르나르가 활력론을 비판하는 동물과 식물에 공통된 생명 현상들에 관한 강의(1878–1879)에서 생명력의 별도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생명력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도, 놀랍게도, 생명력이 "자신이 하지 못하는 현상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역방향으로 나아간다. 달리 말하면, 클로드 베르나르는 노동자로서 구상된 생명력의 개념을 입법자나 지도자로서 구상된 생명력의 개념으로 대체한다. 이것은 행동하지 않고 지도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방식이며, 이것이 방향이 실행에 초월적인 것을 함축하는 방향의 마술적 개념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행 기계론적 장치가 지도와 명령의 능력을 대체하지만, 신이 방향을 한 번 영구히 고정시켰다. 방향은 구성자에 의해 실행 기계론적 장치 안에 포함된다.

요약하자면, 데카르트적 설명과 함께, 겉으로 보이는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목적론의 영역 밖을 나가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 이유는 기계론이 기계들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지만, 기계론은 기계들의 구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계들을 구성할 기계는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기관들이나 유기체들을 기계론적 모델들로 설명하는 것은 기관을 기관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기계들은  이 해석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인류라는 종의 기관들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1). 도구, 기계는 기관들이며, 기관들은 도구들이나 기계들이다. 따라서 기계론과 목적론의 대립이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목적성을 위해 기계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역으로 모든 기계론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계론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운동 의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립은 실제로는 그 의미가 명백한 기계론들과 그 의미가 잠재적인 기계론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자물쇠, 시계의 의미는 명백하다. 적응의 경이로움의 예로 들어지는 게의 배압(boutonnière), 그 의미는 잠재적이다. 따라서 어떤 생물학적 기계론들의 목적성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종종 인용되고 어떤 기계론적 생물학자들의 논거인 예를 들자면, 분만 전 여성 골반 확장의 목적성을 부정할 때, 치골결합의 일종의 이완과 천미골의 후방 경사 운동에 의해 가장 큰 치수가 조금도 증가하지 않는다면 분만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문제를 뒤집는 것으로 충분하다. 태아의 가장 큰 치수가 골반의 가장 큰 치수보다 1센티미터 또는 1.5센티미터 더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만일 치골결합의 일종의 이완과 천미골의 후방 경사 운동에 의해 가장 큰 치수가 조금이라도 증가하지 않는다면, 분만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생물학적 의미가 그만큼 분명한 행위가 생물학적 의미 없는 기계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허용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계론의 부재가 그것을 금지시킬 것이므로 "허용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비상한 기계론 앞에서 우리는 그것이 기계론인지, 즉 필요한 작동들의 연속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효과가 무엇인지, 즉 어떤 목적이 지향되었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형태와 구조로부터만 사용을 결론짓는 것이 아니다. 기계나 유사한 기계들의 사용을 이미 알지 못한다면. 따라서 기계가 기능하는 것을 먼저 보아야 기능에서 구조를 추론하는 것처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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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데카르트적 관계, 즉 기계와 유기체 사이의 관계가 역전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유기체에서는  이것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강조할 필요도 없는  자동구성, 자기보존, 자동조절, 자기수복 현상들이 관찰된다.

기계의 경우, 구성은 기계에 낯선 것이며 기계공의 독창성을 전제한다. 보존은 기계공의 지속적인 감시와 경계를 요구한다. 어떤 복잡한 기계들은 부주의나 감시 소홀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절과 수복에 관해서는, 그것들 역시 인간 행동의 주기적 개입을 동일하게 전제한다.

자동조절 장치들이 확실히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인간이 기계에 기계를 중첩한 것이다. 서보기구나 전자 자동 기계의 구성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그 의미를 변경함 없이 이동시킨다.

기계 안에서, 합리적 계산 규칙들의 엄격한 검증이 있다. 전체는 엄밀하게 부분들의 합이다. 효과는 원인들의 순서에 의존한다. 더욱이 기계는 명확한 기능적 경직성을 나타내며, 이 경직성은 표준화의 실천에 의해 점점 더 강화된다. 표준화는 대상들과 교체 부품들의 모델 단순화, 부품들의 상호교환성을 가능하게 하는 계량적·질적 특성들의 통일이다. 모든 부품은 자연히 제작 한계를 정의하는 공차 내에서 같은 용도의 다른 부품을 대체한다.

이렇게 정의된 기계의 속성들을 유기체의 속성들과 비교했을 때, 기계보다 유기체에서 목적성이 더 많은가 혹은 적은가?

기계에서는 목적성이 더 많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목적성은 경직되고 일의적이며 단일가치적이기 때문이다. 기계는 다른 기계를 대체할 수 없다. 목적성이 한정될수록 공차 한계는 작아지고, 목적성은 더욱 경화되고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유기체에서는 반대로  이것도 역시 너무나 잘 알려져 강조할 필요도 없는  기능들의 대리성(vicariance), 기관들의 다가성(polyvalence)이 관찰된다. 물론 이 기능들의 대리성, 기관들의 다가성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계의 그것들에 비해 훨씬 더 현저하여, 사실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1).

(1) "'인공적'이란 명확한 목적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생명적인 것과 대립된다. 인공적 혹은 인간적 또는 의인론적인 것은 오직 생명적이거나 생기적인 것과 구별된다. 명확하고 유한한 목적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 인공적이 되며, 이것이 점점 커지는 의식의 경향이다. 또한 기능 대리성의 예로, 잘 알려진 매우 단순한 사례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아동의 실어증이다. 아동에서의 우측 반신불수는 거의 실어증을 동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뇌의 다른 영역들이 언어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9세 미만 아동에서 실어증이 존재하더라도 매우 빠르게 사라진다(1). 기관들의 다가성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믿는 대부분의 기관들에 대해 우리는 실제로 그것들이 어떤 다른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매우 단순한 사실을 인용할 것이다. 예컨대 위장은 원칙적으로 소화 기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궤양 치료를 위해 시행된 위절제 후에는 소화 장애보다 조혈 장애가 관찰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위장이 내분비선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 결국 밝혀졌다. 또한, 결코 경이로움의 전시로서가 아니라, 콜레주 드 프랑스 생물학 교수 쿠리에(Courrier)가 수행한 최근의 한 실험 예를 들 수 있다. 쿠리에는 임신한 암토끼의 자궁에서 태반을 절개하여 꺼내 복강에 놓았다. 이 태반은 장에 이식되어 정상적으로 영양을 공급받았다. 이식이 이루어지면 암토끼의 난소를 제거하는데, 이로써 임신 황체의 기능을 억제한다. 이 순간, 자궁 안의 모든 태반들은 유산되고 복강 안에 있는 태반만이 만기에 이른다. 이것은 장이 자궁처럼 기능한 예이며, 더욱 성공적으로 기능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명제를 뒤집고 싶을 것이다. 정치학에서 그는 "자연은 여러 용도에 쓰이는 델포이 칼들처럼 인색하게 행동하지 않고, 각 도구를 오직 하나의 용도에만 쓰이도록 한다. 왜냐하면 모든 도구들 중에서 여러 일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에 쓰이는 것이 가장 완전하게 그 일을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반대로 이 목적성의 정의는 유기체보다 기계에 더 잘 맞는 것 같다. 결국 유기체에서 기능들의 다수성은 하나의 기관의 단일성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유기체는 기계보다 더 넓은 행동 여지를 갖는다. 유기체는 목적성이 더 적고 잠재력이 더 많다(1). 계산의 산물인 기계는 계산의 규범들, 정체성·항상성·예측의 합리적 규범들을 검증한다. 반면 살아있는 유기체는 경험주의에 따라 행동한다. 생명은 경험이다. 즉 발생하는 것들의 즉흥적 활용이다. 생명은 모든 방향에서 잠정적이다. 이로부터 비롯되는, 동시에 널리 알려져 있고 자주 오해받는 사실은, 생명이 기형들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기계 괴물은 없다. 기계 병리학은 없다. 비샤는 생리학 및 의학에 적용된 일반 해부학(1801)에서 이미 이를 지적한 바 있다. 괴물들이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는 물리학과 역학에서는 정상과 병리의 구분이 없다. 구분은 살아있는 존재들 내부에만 있다.

특히 실험 발생학의 연구들이 생명 현상 해석에서 기계론적 유형의 표상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배아가 한 번 작동되면 이러저러한 기관을 자동적으로 산출하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특수한 기계 장치"(퀴에노)를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이다. 데카르트의 개념이 그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체 묘사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떤 특정 종의 동물, 예컨대 인간의 씨앗의 부분들이 무엇인지 알면, 그로부터만으로, 확실하고 수학적인 근거로, 그것의 사지 각각의 전체 모양과 형태뿐 아니라 이 형태의 몇 가지 특징들을 알면 그 씨앗이 무엇인지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욤(Guillaume)이 지적하듯(1), 생명체를 자동 기계에 더 많이 비교할수록 기능은 더 잘 이해되는 것 같지만 발생은 덜 이해된다. 만약 데카르트의 개념이 참이라면, 즉 배아에 전성(préformation)이 있고 발달에 기계론이 있다면, 출발점에서의 변형은 난의 발달에 장애를 야기하거나 그것을 막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과 전혀 다르며, 드리슈(Driesch), 회르스타디우스(Hörstadius), 슈페만(Speman), 망골트(Mangold)의 연구들에 이어 이루어진 난의 잠재력 연구가 발생학적 발달이 기계론적 모델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예컨대 성게 난에 관한 회르스타디우스의 실험들을 들어보자. 그는 성게 난 A 16단계에서 수평 대칭면에 따라 절개하고, 다른 난 B는 수직 대칭면에 따라 절개한다. 그는 A의 절반 하나를 B의 절반 하나에 접합시키면 난이 정상적으로 발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드리슈는 16단계에서 성게 난을 취해 두 박판 사이에서 압축하여, 양 극의 세포들의 상호 위치를 변형시킨다. 그래도 난은 정상적으로 발달한다. 따라서 이 두 실험들은 우리에게 효과의 그 원인들의 순서에 대한 무관심을 결론 짓게 한다. 더욱 인상적인 또 다른 실험이 있다. 2단계에서 성게 난의 할구(blastomères)를 취하는 드리슈의 실험이다. 해수에서 기계적으로 혹은 칼슘 염을 제거하여 화학적으로 이루어지는 할구들의 분리는 각각의 할구가 정상 치수에 가까운 정상 유충으로 발달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따라서 여기서 효과의 원인의 양에 대한 무관심이 있다. 원인의 양적 감소는 효과의 질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다. 반대로 두 성게 난을 결합시키면 정상 유충보다 더 큰 단 하나의 유충이 얻어진다. 이것은 효과의 원인의 양에 대한 무관심의 새로운 확인이다. 원인을 분할하는 실험은 원인을 곱하는 실험을 확인한다.

모든 난의 발달이 이 도식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문제는 오랫동안 두 종류의 난들, 즉 성게 난 유형의 조절란과 개구리 난 유형의 모자이크란을 다루는지에 있었다. 모자이크란에서는 첫 번째 할구들의 세포적 운명이 동일하다. 분리되든 결합된 채로 있든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현재 두 현상 사이에는 단순히 소위 "모자이크" 난들에서 결정의 출현의 조숙 정도의 차이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이른다. 한편으로는 조절란이 일정 단계에서부터 모자이크란처럼 행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구리 난의 2단계 할구가 역전되면, 조절란처럼, 완전한 배아를 산출한다(1).

따라서 유기체를 가능한 한 복잡한 자동장치들의 조합에 동화시킴으로써 유기체에서 목적성을 제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 것 같다.기계의 구성이 기계 자체의 기능이 아닌 한, 유기체의 전체성이 분석이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부분들의 합과 동등하지 않은 한, 유기체 생물 조직의 선행성을 기계론적 구성들의 존재와 의미의 필요 조건들 중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 정당하게 보일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기계를 설명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기계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에 생명의 역사를 기입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에 그것을 기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과 함께 단순한 자연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화의 출현을 오인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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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기계를 문화의 사실로서, 그 자체는 설명해야 할 자연의 사실에 불과한 기계론들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기에 이르렀다. 원리들의 유명한 텍스트에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쓴다. "기계론의 모든 규칙들은 물리학에 속하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인공적인 모든 것들은 그로써 자연적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시계가 시계 바퀴의 도움으로 시각을 알려줄 때, 그것이 나무가 과실을 산출하는 것보다 더 자연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IV, 203)(2).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우리는 시계와 나무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고 역전시켜야 한다. 처음에는 단지 꿈꾸거나 바라던 어떤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조립된 기계론들의 모든 부품들이, 나무들의 과실 맺음이라는 유기적 활동만큼이나 진정으로, 그리고 원시적으로는 그 규칙들과 효능을 보장하는 법칙들에 대한 의식도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식물적 생명만큼이나 무의식적으로, 기술적 활동의 즉각적이거나 파생적인 산물들이다. 물리학의 지식이 주어진 시점에서 기계 구성에 미치는 논리적 선행성은, 물리학 지식의 구성에 대한 기계 구성의 연대기적·생물학적 절대적 선행성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와 반대로 한 동일한 저자가 기계에 대한 유기체의 비환원성과, 대칭적으로, 과학에 대한 기예의 비환원성을 주장했다. 그것은 판단력 비판에서의 칸트이다. 프랑스에서는 칸트에게서 기술 철학을 찾는 습관이 없지만, 기술 철학에 풍부한 관심을 가진 독일 저자들이, 특히 1870년 이후, 그러했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 § 65에서, 칸트는 시계의 예를 이용하면서, 데카르트에게 그토록 소중한, 기계와 유기체를 구별한다. 기계 안에서, 그는 말한다, 각 부분은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지만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떤 부품도 다른 것에 의해 산출되지 않고, 어떤 부품도 전체에 의해 산출되지 않으며, 같은 종의 전체에 의해서도 산출되지 않는다. 시계를 만드는 시계는 없다. 어떤 부분도 스스로를 대체하지 않는다. 어떤 전체도 그것이 결핍된 부분을 대체하지 않는다. 기계는 따라서 동력을 가지지만, 외부의 물질을 조직화하고 전파할 수 있는 형성 에너지는 가지지 않는다. § 75에서, 칸트는 생명의 의도적이지 않은 기술을 인간의 의도적인 기술과 구별한다. 그러나 미적 판단력 비판 § 43에서, 칸트는 한 중요한 텍스트를 통해 이 기술의 인간적 독창성을 앎에 대한 것으로 정의했다. "인간의 기예(habilité)인 예술은 과학과도 구별된다. 마치 실천 능력이 이론 능력과 구별되듯, 기술이 이론과 구별되듯.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알고 원하는 효과를 충분히 알아도 그것을 곧바로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은 예술이라 불리지 않는다. 과학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어도 수행할 기예를 갖지 못하는 것, 그것만이 이런 의미에서 예술이다. 캄퍼는 최선의 신발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매우 정확하게 기술했지만, 그는 분명 신발 하나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이 텍스트는 크란할스(Krannhals)가 그의 저서 Der Weltsinn der Technik에서 인용하면서, 모든 기술은 본질적으로 합리화로 환원될 수 없는 생명적 독창성을 긍정적으로 포함한다는 사실의 인식이라고 정당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해석한다(1). 실제로, 손의 솜씨, 조정의 합성, 생산에서의 종합, 독창성이라 불리고 때로는 본능에 책임을 돌리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그것의 형성적 운동에서, 포유동물의 난이 난소 밖에서 산출될 때만큼이나 설명할 수 없다. 비록 원형질의 물리화학적 조성과 성 호르몬의 조성이 완전히 알려져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기계 구성에 관해 엔지니어들의 연구보다 민족지학자들의 연구에서 더 많은, 비록 아직 미약하지만, 빛을 찾는 이유이다(2). 프랑스에서는 민족지학자들이 현재로서는 철학자들이 무관심했던 기술 철학 구성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은 무엇보다 과학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반대로 민족지학자들은 무엇보다 최초의 도구들, 자연에 대한 행동의 최초의 장치들과 유기적 활동 자체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이런 질문들을 제기한 유일한 철학자는 알프레드 에스피나스이며, 우리는 그의 고전적 저서 기술학의 기원(1897)을 참조한다. 이 저서는 에스피나스가 1890년경 보르도 문과대학에서 행한 강좌의 계획을 담은 부록을 포함한다. 이 강좌는 의지를 주제로 했으며, 에스피나스는 의지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실천적 활동, 특히 도구의 발명을 다루었다. 에스피나스가 최초의 도구들의 구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유기적 투사 이론을 독일 저자 에른스트 카프(Ernst Kapp, 1808–1896)에게 빌려왔음이 알려져 있다. 카프는 1877년 저서 Grundlinien einer Philosophie der Technik에서 처음 이를 제시했다. 독일에서 고전적인 이 저서는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알려지지 않아, 쾰러와 기욤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동물의 도구 사용과 지능의 문제를 다시 다룬 일부 심리학자들이 이 투사 이론을 카프 자신이 아닌 에스피나스에게 귀속시키고 있다. 에스피나스가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카프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 투사 이론에 따르면 철학적 토대는 폰 하르트만과 무의식의 철학을 거쳐 쇼펜하우어까지 소급되는데, 최초의 도구들은 인간 기관들의 단순한 연장에 불과하다. 

운동 중인. 부싯돌, 몽둥이, 지렛대는 팔의 타격적 유기 운동을 연장하고 확장한다. 이 이론은 모든 이론이 그러하듯 특히 불의 발명이나 인간 기술에 특징적인 바퀴의 발명 같은 발명들의 설명에서 한계를 갖는다. 이 경우 불이나 바퀴의 연장 또는 확장이 될 몸짓과 기관들을 찾는 것은 여기서 헛된 일이다. 그러나 망치나 지렛대에서 파생된 도구들에 대해, 이 모든 도구 계열에 대해 설명은 허용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사실들뿐만 아니라 기술의 생물학적 철학이 구성될 수 있는 가설들을 모아놓은 것은 민족지학자들이다. 독일인들이 철학적 방식으로 구성한 것  예컨대 알라르 뒤 부아-레이몽(Alard Du Bois-Reymond, 1860–1922)이 저서 Erfindung und Erfinder(1906)에서 한 것처럼, 변이와 자연선택에 관한 다윈의 개념들에 기초한 발명 발달 이론, 혹은 O. 슈펭글러가 저서 Der Mensch und die Technik(1931)에서 기계 구성을 "생명의 전술"로 한 것  을 우리는 르루아-구랑(Leroi-Gourhan)이 저서 환경과 기술에서 직접적 파생 없이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외부의 먹이를 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덩어리 밖으로 확장을 내보내는 아메바의 운동에 동화함으로써, 르루아-구랑은 도구 구성 현상을 이해하려 한다. "만약 타격(percussion)이 근본적인 기술적 행위로 제안되었다면, 그것은 거의 모든 기술적 행위들에 촉각의 탐구, 접촉의 추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메바의 확장이 항상 동일한 소화 과정으로 먹이를 이끌어 가는 반면, 그것이 처리해야 할 물질과 그것을 포용하는 기술적 사고 사이에서, 각각의 상황에 맞게, 타격의 기관들이 창출된다(p. 499)." 그리고 이 저서의 마지막 장들은 생물학과 기술 사이의 현재로서는 가장 인상적인 체계적이고 잘 뒷받침된 접근 시도의 예를 구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계 구성의 문제는 전통적 해결책과 전혀 다른 해결책을 얻는다. 데카르트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관점, 즉 기술적 발명이 하나의 앎의 적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관점과는.

기관차의 구성을 "과학의 경이"로 제시하는 것이 고전적이다. 그러나 증기 기계의 구성은 사전의 이론적 지식들의 적용이 아니라, 광산 배수라는 오직 기술적인 문제의 천 년된 문제에 대한 해결임을 안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펌프의 자연적 형태들의 역사, 처음에는 증기가 동력원의 역할을 하지 않고 피스톤 아래에서 응결에 의해 대기압이 피스톤을 내리게 하는 진공을 생성하는 데 사용된 증기 펌프들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관차에서 본질적인 기관이 실린더와 피스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1).

이러한 사유의 맥락에서 르루아-구랑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관차의 조상을 생물학적 의미에서 물레방아에서 찾는다. "물레방아 같은 기계들에서, 그는 말하기를, 현재의 증기 기관과 동력원들이 나왔다. 원운동 주변에 우리 시대의 발명적 정신이 기술들에서 발견한 가장 고차적인 것들 전부가 집결된다. 크랭크, 페달, 전동 벨트(p. 100)." 또 이렇게 말한다. "발명들의 상호 영향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물레방아 없이는 기관차가 없었을 것임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p. 104)(1)."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19세기 초는 기관차, 자동차, 비행기에 물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기계의 형태들을 모르고 있었다. 수세기 전부터 알려진 스무 가지 응용들에 흩어진 기계론적 원리들이 발견된다. 이것이 발명을 설명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발명의 본질은 발명을 어떤 의미에서 즉각적으로 물질화하는 것이다(p. 406)." 이러한 논평들의 빛 아래서, 과학과 기술은 상호 해결책을 빌리지만 서로 하나가 다른 것에 접목되는 것은 아닌 두 유형의 활동들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echniques (Que Sais-je? 총서, 1945)는 이론에 대한 기술의 선행성을 강조한다. 증기 기관의 다양한 기관들과 다양한 사용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렌델(A. Vierendeel) 기술사 개요(브뤼셀-파리, 1921)를 참조하기 바란다. 와트의 작업 역사에 관해서는 피에르 드보(Pierre Devaux) 과학의 모험에서 「와트 또는 아리엘 엔지니어」 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Gallimard, 1943).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기술들의 합리화이다. 그것은 기계들의 비이성적 기원을 잊게 하며, 이 영역에서도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주의를 옹호하고자 할 때 특히 비이성적인 것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1).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기술적 발명들을 생명체의 행동들로서 체계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 기계와 유기체의 관계 역전이, 현대 산업 사회들에서 기계의 일반화된 사용이 인간들에게 조금씩 부과해 온 태도 속에서 어느 정도의 확인을 찾는다는 것이다. G. 프리드만(G. Friedmann)의 중요한 저서 산업 기계주의의 인간적 문제들은 기계-인간 관계의 제1항으로 유기체를 되돌려 놓은 반응의 단계들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테일러와 노동자 동작 합리화의 첫 번째 기술자들과 함께, 우리는 인간 유기체가 이를테면 기계의 기능에 맞춰 정렬되는 것을 본다. 합리화는 수익률을 어떤 수의 인자들의 수학적 함수로 간주하는 관점에서만 쓸모없는 동작들을 제거하려는 한, 유기체의 기계화이다. 그러나 기술적으로 쓸모없는 동작들이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동작들이라는 확인이 기술적으로 인간 유기체를 기계에만 예속시키는 이 동화에 대해 처음으로 부딪히는 장애물이었다. 거기서부터,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생리적·정신기술적·심리적 조건들(인격의 가장 원초적 핵심의 가치들을 고려하기에 이름으로써)에 대한 체계적 검토가 프리드만이 기계를 인간 유기체에 적응시키는 기술의 구성이라는 불가피한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지는 역전을 이끌었다. 이 기술은 그에게 원시 민족들이 유기적 규범에 효율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경제적인, 즉 인간 유기체 자체에 긍정적 가치 평가의 기준이 있고 기계에의 배타적 종속에 대해 자발적으로 저항하는 행동의 유기적 규범에 자신들의 도구들을 항상 적응시키고자 했던 경험적 과정들의 과학적 재발견처럼 보인다(p. 96, 주석). 그리하여 프리드만은 아이러니도 역설도 없이, 서구의 산업 발전을 민족지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다(p. 369).

요약하자면, 기술을 보편적인 생물학적 현상으로 간주하고(1), 더 이상 인간의 지적 작업으로만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한편으로는 모든 지식에 대해 예술들과 직업들의 창조적 자율성을 긍정하게 되는데, 이 지식은 그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그것들에 적용되거나 그것들에 알림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론을 유기체 안에 기입하게 된다. 그렇다면 유기체가 어느 정도까지 그 구조의 관점에서도 그 기능들의 관점에서도 기계로 간주될 수 있거나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나 반대의 견해, 즉 데카르트적 견해가 생겨날 수 있었던 이유들을 찾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밝히려 시도했다. 우리는 유기체에 대한 기계론적 개념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물리적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개념보다 덜 의인론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정당화하려 시도한 해결책은 인간이 기술에 의해 생명과 연속성 안에 있음을 보여주되, 인간이 과학에 의해 책임지는 단절을 강조하기 전에 그럼으로써 한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 해결책은 너무 많은 작가들이 주제들의 독창성에 대해 요구 사항이 높지 않은 채로 주기적으로 기술과 그 진보에 맞서 향수 어린 기소장을 작성한다는 불이익을 아마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지원군으로 활동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 생명체가 기계의 기술을 갖추었다면, 이 방대한 현상은 비용 없이 따라서 요구에 따라 철회 불가능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방금 검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