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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 앙뚜안 마위, 제4장 자의적 운동과 합일 요약

불난집이름 나보코프 2026. 4. 15. 06:28

델핀 앙뚜안 마위, 4장 자의적 운동과 합일

 

1. 신경학, 근육학, 기계론 : 예비적 고찰

 

[자의적인 운동의 범위의 확장] 

데카르트에게서 자의적인 것의 범주는 동시대 의사들보다 넓다. 동시대 의사들은 자의적 운동의 기관을 근육으로 한정했지만, 데카르트는 심장에 연결된 신경에 대한 의지의 간접적 작용도 인정한다. 영혼이 공포의 정념에 종속될 때는 동물 정기가 심장의 신경들 속으로 동시에 퍼져나가지만, 영혼이 용기의 정념을 불러일으키기로 결심할 때, 동물 정기는 방어를 위해 손을 움직이는 데 쓰이는 신경으로도, 피를 심장 쪽으로 격동시키고 밀어내는 신경 쪽으로도 퍼져 나간다. 

>> 데카르트에게서 자발적인 것의 범주는 동시대 주요 의사들에 비해 더 넓은 외연을 부여받는다.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근육만을 자발적 기관으로 인정하는데, 데카르트의 범주는 동물 정기, 신경, 그리고 근육에 대한 더 복잡한 관계를 내포한다. 

 

[기계론의 요청 : 운동의 의지로부터의 독립성]

그러나 기계론은 운동 기능에 의지로부터의 독립성을 부여한다. 영혼은 기관들이 잘 배치된 경우에만 운동을 일으킬 수 있으며, 역으로 기관들이 배치되어 있을 때, 신체는 영혼 없이도 운동을 산출한다. 자의적 운동조차 주로 기관의 배치에서 비롯한다. 

>> 직접적, 자의적 운동의 자연화’(naturalisation)

 

[3의 운동 영역의 부재]

자의적/자동적이라는 이분법은 예외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운동을 위한 제3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경련, 간질, 몽유병 등은 통상적이지 않더라도 자연의 법칙에 복속되며, 순수 기계론적으로 설명된다. 이성적 영혼 이외의 모든 영혼을 배제하고 이성적 영혼 자체를 영혼화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데카르트의 입장은 비자발적 운동의 자연화까지 요구한다. 모든 신체 운동은 아무리 희귀하더라도 권리상 항상 지정 가능한 기계적 원인에 의해 설명 가능하다. 

>> 이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자발적 운동은 데카르트에게서 예외적인 것의 모습을 띤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만 유보된 것이다. 

>> 물음: 자발적 운동이 자동 운동보다 무언가 더한 것을 가진다면,  무언가는 단지 비물질적 의지의 개입에만 있는가, 아니면 생리학적 층위에서도 포착 가능한가? 직접적 자의적 운동의 생리학은 형이상학으로부터 독립적인가, 아니면 그것에 종속되어 있는가?

 

2. 자발적 운동의 생리학

[대립 근육들의 대응 테제 : 세 층위의 정기의 흐름]

데카르트에게서 근육의 수축과 이완은 동물정기의 유입과 유출에 의해 설명된다. 그런데라 포르주가 정식화하듯이, 문제의 출발점은 다음과 같다. 뇌에서 내려오는 정기의 양은 극히 미량인데, 어떻게 그 소량이 사지를 그토록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가? 정기가 근육의 피부와 살을 통해 끊임없이 소실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더욱 문제적이다. 

>> 데카르트의 대답 : 대립 근육들의 대응 테제 

(1) 1흐름 (  근육) : 결정적 신호이지만 양은 극히 적다. 수축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 방향을 결정하는 촉발자다. 

(2) 2흐름 (근육 내부 순환) : 이미 근육 안에 갇혀 빠르게 움직이는 다량의 정기. 출구가 없을 때는 제자리에서 소용돌이친다. 근육의« 영구적 반-수축 상태 »(현대적 근육 긴장도에 해당)를 유지한다. 

(3) 3흐름 (한 근육  길항근) : 수축을 촉발하는 발효의 진정한 원인. 한 근육의 정기가 길항근으로 쏟아지면서 한쪽은 팽창-수축하고, 다른쪽은 이완-신장된다. 

>> 데카르트는 이처럼 수축의 메커니즘을 세 심급으로 구분한다. 뇌의 미세한 신호 차이가 제3흐름을 방향 지움으로써 신속하고 강력한 운동이 가능해진다. 

 

[판막의 역할]

이 구조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판막이다. 판막의 본질적 기능은 정기가 들어온 뇌의 경로로 역행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역행이 허용되면 어떤 수축도 지속될 수 없다. 판막은 세 가지 상태를 조율한다. 

(1) 뇌의 유입이 미약하면 판막은 반쯤 열린 채 근육은 이완을 유지한다. 

(2) 양쪽에 균등하게 증가하면 판막이 닫혀 근육이 함께 수축하며 사지를 동일한 위치에 고정한다. 

(3) 정기가 한쪽 근육의 도관으로 집중되면 길항근의 « 작은 문 »이 열리며 정기가 쏟아져 사지의 위치가 변한다. 

>> 이것이 근육 운동의 자연적 기능의 규범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계는 외부적으로(보행, 팔의 운동, 눈의 운동 등), 그리고 내부적으로(소화, 호흡 등) 움직인다. 여기에는 영혼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어떤 개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 동일한 생리학이 동물적 근육 운동과 자발적 근육 운동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음]

그렇다면 왜 데카르트는 레기우스가 자신의 근육 운동 개념을 오해한 것을 진정한 형이상학적 배반으로 간주하는가? 

 

3. 반대 근육들의 대응 테제의 형이상학적 쟁점 : 데카르트/레기우스 논쟁

[레기우스에 대한 세 가지 불만과 레기우스가 저지른 이중 오류] 

데카르트의 레기우스에 대한 불만은 세 층위다. 

(1) 우정의 배반과 저작권의 도용

(2) 생리학적 오류

(3) 형이상학적 배반 

먼저, 데카르트는 자신이 (1)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나머지 둘이다. 

(2)의 경우, 레기우스는 판막의 존재를 누락한 것이 아니다. 그는 판막을 도판으로까지 재현했고, 세 가지 경우의 수도 충실히 표절했으며, 경련에 관한 데카르트의 설명도 그대로 차용했다. 

오히려 레기우스가 놓친 것은 판막의 기능’, 즉 정기의 역행을 차단하는 단방향성이었다. 그 결과 레기우스의 설명에서는 정기가 판막을 통해 양방향으로 유출입한다. 판막이 한 방향으로만 열리고 닫힐 수 있는 진정한 이라는 설명을 누락했기 때문에, 레기우스는 데카르트의 설명을 역학의 규칙들에 반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에 더해, 형이상학적 오류는 더 근본적이다. 레기우스는 자연학에서는 데카르트를 맹목적으로 따랐지만, 형이상학에서는 맹목적으로 반박했다. 그에게 영혼은 신체 안에 있는 한 유기적이며, 이 유기적 영혼이 판막을 통해 신체 전체를 왕복 순환함으로써 자의적 운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영혼을 물질화하는 것이며, 데카르트가 타파하려 했던 질료 형상론의 부활이다.

« 판막의 기능을 놓치는 것은, 수의 근육 운동의 경우에 있어서, 합일의 관점이 지닌 고유한 특수성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영혼이 신체 전체를 순환하지는 않는다 해도, 영혼은 특정한 의지(팔을 들어 올리거나, 도망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 등)를 정확하게(저 사지에서가 아니라 이 사지에서) 신체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의지의 생리학적 효과들(동물정기의 수송과 사지의 운동)과 심리학적 결과들(영혼에 의한 그 의지의 효과에 대한 지각)은 거의 즉각적이어야 하며, 그 의지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판막들과 그것들이 가능하게 하는 순환은 바로 이 모든 요건들을 충족시킨다. 판막들은 정확하게, 영혼의 신체에 대한 작용질료형상론의 지지자들에게는 너무나 쉽게 이해되고 일반화되어 있지만 데카르트에게는 여전히 훨씬 더 생각하기 어렵게 남아 있는을 가능하게 해 줄 작은 생리학적 「가정(supposition)」을 지칭하는 것이다. »

 

[물음에 대한 답: 자동 운동과 자의 운동은 생리학적으로 동일한 기제를 사용하는데, 그렇다면 양자 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첫 번째 기준: 시작의 중심과 정기의 방향 (생리학적 기준)

자동·반사·본능적 운동의 공통적 구조는 감각 국면  운동 국면이며, 운동 국면에 영혼의 개입이 없다. 두 예가 이를 보여 준다. 『인간론』의 화상-굴곡 반응은 전 과정이 기계에 귀속된다. 『정념론』 13조의 눈 깜박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지가 있음에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기계가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함을 보여 준다. 

자발적 운동은 구조가 역전된다. 운동 국면이 먼저. 영혼에 의한 송과샘의 진동에서 시작되어 신경 기공이 열리는 "감각-운동 호의 역전"(plané diverso et contrario motu)이 그것이다. 정기의 방향도 반대다. 자동 운동이 신경    근육으로 흐른다면, 수의 운동은 송과샘  신경  근육으로 흐른다. 영혼에서 송과샘으로의 "통로"는 설명하지 않는다—"단지 의지가 다리를 움직이고자 하기 때문에만" 신체는 걷기 시작한다.

>> 같은 기계를 쓰지만 신호의 출발점과 방향이 반대. 자동 운동은 자극    근육 순서로 일어난다. 불에 데면 발이 반사적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외부 자극이 먼저 오고 몸이 반응한다. 여기서 영혼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자의적 운동은 반대다. 영혼이 먼저 송과샘을 흔들고, 그 신호가 송과샘  신경  근육 순서로 흐른다. "다리를 움직이고 싶다"는 의지가 출발점이 된다. 

 

두 번째 기준: 다양화의 힘 (합일의 관점에서 본 혼합적 기준)

자발적 운동은 합일의 관점에서 행위와 운동으로 분리될 수 없는 통일된 전체다. 체화되는 순간 인간적 행위로 인식 가능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두 가지 판별 기준을 제시한다. 

(1) 말이나 기호를 배열하여 언어를 형성하는 것,

(2) 인식에 의해 혹은 의지에 의해 인도되어 행동하는 것. 

첫 번째는 두 번째의 특수한 경우다.

핵심은 "적절하게"(à propos) 라는 표현에 있다. 자발적 운동은 새로운 기관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연적·동물적 기계 과정과 동일한 생리학을 사용하되,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전용하는 것이다. 라 포르주의 말로 하면, 신체를 움직이는 영혼의 힘이 운동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따라서 기관의 차이가 아니라 기능의 차이. 동일한 기관에 영혼을 통해, 그리고 신체의 "증언"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독창적 기능을 부여할 수 있는 역량이것이 인간이 "암말보다 무언가 더한 것을 가진" 이유다. 자발적 운동의 특수성은 생리학만으로도, 형이상학만으로도 포착되지 않으며, 복합체(composé)에 고유한 기능 개념, 즉 양자의 교차점에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 두 번째 답: 인간만이 기계를 "적절하게" 쓸 수 있다.

[동물은 포식자를 보면 도망친다. 같은 근육을 쓰고, 생리학적으로는 인간이 도망치는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동물의 도망침은 순전히 자극-반응이다. 포식자라는 자극  공포라는 정념  도주 운동. 이 전체가 기계적으로 일어난다. 인간도 놀라서 반사적으로 움츠러들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상황을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다. 예컨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것, 또는 반대로 위험하지 않은데도 전략적으로 도망치는 것. 이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의지가 상황 전체를 읽고 기계적 과정을 전용하는 것이다. ‘적절하게라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다. 인간은 삶의 매 순간 상황에 맞게 기계적 과정을 다른 목적으로 쓸 수 있다. 동물은 자극이 오면 정해진 반응을 할 뿐이다. 인간은 동일한 기계를 갖고도 그것을 의지로 방향을 틀 수 있다. 새로운 근육이나 신경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장치를 다른 목적으로, 다른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작동시키는 능력, 이것이 다양화의 힘이고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