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26 septembre 2025
4/ Descartes,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 règle XI (AT X, 405-406/trad. J.-M. et M. Beyssade, rev. F. de Buzon, D. Kambouchner, Pléiade I, 63-64). Quelques-uns s’étonneront peut-être qu’en ce lieu où nous cherchons par quel moyen nous rendre plus aptes à déduire les vérités les unes des autres, nous omettions tous les préceptes des dialecticiens, par lesquels ils croient gouverner la raison humaine, en prescrivant certaines formes d’argumentation qui concluent avec tant de nécessité que la raison s’y fie, même si elle se donne en quelque façon congé (ferietur) d’une considération évidente et attentive de l’inférence elle-même, peut tout de même conclure en vertu de la forme à quelque chose de certain. C’est que, nous l’avons remarqué, la vérité s’échappe souvent de ces enchaînements, tandis que ceux-là mêmes qui s’en sont servis restent pris dans leurs filets. Ce qui n’arrive pas si fréquemment aux autres ; et, nous en faisons l’expérience, tous les sophismes les plus aiguisés ne trompent d’habitude personne qui use de la pure raison, mais bien les sophistes eux-mêmes.
C’est pourquoi, ici où notre principal souci est de ne pas mettre notre raison en congé quand nous examinons la vérité de quelque chose, nous rejetons ces formes-là comme contrariant notre projet, et sommes plutôt à la recherche de tous les auxiliaires qui peuvent retenir notre pensée dans l’attention, ainsi qu’il sera montré dans les règles qui suivent. Mais pour qu’il apparaisse avec plus d’évidence que cet art de l’argumentation n’apporte absolument rien à la connaissance de la vérité, il faut remarquer que les dialecticiens ne peuvent former dans les règles de l’art aucun syllogisme qui conclue au vrai, à moins d’en avoir possédé antérieurement la matière, c’est-à-dire à moins d’avoir déjà reconnu auparavant la même vérité, qui s’y déduit. D’où il ressort qu’eux-mêmes, par une telle forme, n’aperçoivent rien de nouveau, et que, par suite, la dialectique ordinaire est tout à fait inutile à ceux qui désirent rechercher la vérité des choses : elle peut seulement servir quelquefois pour exposer plus facilement à d’autres des raisons que l’on connaît déjà, et par conséquent il faut la faire passer de la philosophie à la rhétorique.
혹자는 우리가 이곳에서 진리를 서로로부터 더 잘 연역해내는 방법을 탐구하고자 하면서, 인간 이성을 다스린다고 믿는 변증론자들의 모든 규칙을 생략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변증론자들은 일정한 논증 형식을 규정하여, 그 형식이 너무나도 필연적으로 결론을 도출해내기 때문에, 이성은 비록 자신이 추론 자체를 명증적이고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더라도, 그 형식으로 인해 확실한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주목했듯이, 진리는 자주 이러한 연쇄에서 빠져나가 버리고,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던 사람들이 그 그물에 걸려들고 만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가장 예리한 궤변조차도 순수한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을 속이는 일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궤변가들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물의 진리를 조사할 때, 이성을 쉬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이곳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형식들을 우리의 기획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배척하고, 오히려 우리의 사유가 주의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보조 수단들을 탐구하고자 한다. 이는 바로 다음 규칙들에서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의 기술이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점을 더욱 명확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변증론자들이 [결론의] '질료'를 미리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즉, 삼단논법에서 도출되는 [결론의] 진리 자체를 미리 알고 있지 않는 한, 기예의 규칙들 안에서 참에 이르는 어떤 삼단논법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변증론자들은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는 어떤 새로운 것도 인식하지 못하며, 따라서 통상적인 변증법은 사물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다. 통상적인 변증법은 다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추론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만 가끔 쓰일 수 있을 뿐이며, 그러므로 변증론은 철학으로부터 수사학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1) 첫 번째 비판: 형식주의(Formalisme)에 대한 비판: 삼단논법은 진리(vérité)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명증성(évidence)을 보존하는 것. 진리를 보존하는 것은 오직 la saisie intuitive가 할 수 있는 일. (La vérité doit faire l'objet d'une saisie intuitive.)
(2) 두 번째 비판: le caractère épistémologiquement stérile du syllogisme (삼단 논법의 인식론적으로 무익한 특성)에 대한 비판: 새로운 인식을 산출하는 데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결론의 참이 전제되어 있다. 삼단 논법은 전제들(대전제와 소건제)로부터 결론을 연역한다. 그러나 (외연적 의미로 이해된/comprise en extension) 대전제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즉, 대전제가 종이나 류를 지시하는 경우, 삼단 논법은 진리를 발견하는 데 무용하다. (extension과 intension의 구분은 데카르트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아르노와 니콜에 의해 만들어진다.)

데카르트는 전통적 논리학과 "자신의 논리학"을 대립시킨다. <방법서설> 2부에서 데카르트는 기하학의 방법(la méthode des géomètres)을 논리학(logique)과 대립시킨다. 논리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게 만든다. 데카르트에게 진정한 원칙(préceptes)은 '방법의 규칙'이다. (Modèle d'Archimède ou Papus)
(1) 명증성의 규칙 – 참이라고 명확히 아는 것만을 믿을 것
(2) 분해의 규칙 – 가능한 단순한 부분으로 나눌 것
(3) 종합의 규칙 – 단순한 것에서 보다 복잡한 것으로 상승할 것
(4) 열거의 규칙 –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도록 검토할 것
진정한 논리학(vraie logique) – exercice de l'esprit qui consiste à penser selon le précepte de la méthode. 논리학의 목적은 판단을형성하는 것. Il faut s'habituer à identifier des idées claires et distinctes. Règle du vrai = apprendre à reconnaître les idées claires et distinctes. 정신을 복잡하게 하는(encombrer) 너무 많은 수의 규칙들에 대한 반대.
엄밀한 의미의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사유를 체계화 하면서, '논리학'을 위한 자리를 찾으려고 했다.
(1) Jacques du Roure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데카르트의 논리학을 병치시킴(justaposer), 그의 책에서 자크 뒤 루르는 논리학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a) une partie scolastique (universaux, catégories, définitions, divisions, arguments) (b) Une partie qui est une logique cartésienne : <방법서설>의 2부의 요약.
(2) Johan Clauberg : 두 논리학을 병치시키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하나의 종합을 제시함. 그의 논리학은 네 부분으로나뉨 (a) les catégories (b) les jugements et ses propriétés (dont le syllogisme) 이 두 부분은 스콜라 철학과 인문주의적변증론의 결합이었다. (c) partie sur les préjugés de l'enfance : 이 부분은 데카르트주의적, 여기에서 논리학의 네 단계(degrés), 혹은 네 수준(niveaux)을 나눔. l'attention / le jugement / le raisonnement / la mémoire (d) la méthode / l'ordre : 다른 스콜라 철학 책처럼 방법에 대한 논의로 마무리.
(3) Arnauld & Nicole : "ordonner"라는 네 번째 작용을 추가한다. 이것이 매우 전형적인 데카르트주의다. 이 4부는 방법에 헌정된다. 이것은 스콜라 논리학으로부터 주어진 원칙들에 데카르트적인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다. 아르노의 논리학은 (a) 전통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논리학에도 영향을 받고 + (b) Terministe 전통에서도 영향을 받고 (c) 데캌르트에게서도 영향을 받는다. les propriétés des termes et la suppositio에 대한 강조는 확실히 terministe에게서 받은영향이다. / 이러한 아르노의 논리학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통적인 논리학 위에 데카르트를 한 칸 더 쌓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4부를 보면, 매우 데카르트적인 주제를 다룬다. 여기는 분석적 방법과 종합적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 méthode = nature analytique ou synthètique. 그런데 여기에서는 <방법서설>보다는 <규칙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무엇보다도 파스칼의 De l'Esprit géométrique et de l'art de persuader의 영향을 받았다. / 이 책은 19세기까지 corpus scolaire의 일부였다. 여러 번 재간되었고, lectures obligatoires à Oxford et Cambridge.
1966년, 푸코의 <les Mots et les choses>, 그리고 촘스키의 <Cartesian linguistics>가 출간됨. 이 두 참고문헌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푸코는 포르루아얄 논리학의 기호학적 개념(la conception sémiotique)를 고전주의 시대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이 시기에는 기호가 이제부터 지시 대상(la chose signifiée)과 분리되며, 정신에 완전히 명료한 것으로 제시되었다.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대" 인식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le signe n'est plus chargé de rendre le monde proche de soi… mais de l'étaler…" 즉, 고전주의 시대는 표상의 시대이다. 기호는 정신과 표상을 연결하는 투명한 매개로 작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친 단순화를 주의해야 한다. 기호에 대한 사유는 결코 포르-루아얄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포르-루아얄 논리학 역시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기호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주의 언어학>에서 촘스키는 논리학보다는 문법을 다룬다. 그에 따르면, 현대 변형생성문법(grammaire transformationnelle contemporaine)은 포르-루아얄 논리학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에서의 결론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언어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구별(distinction entre un aspect externe et un aspect interne du langage) : 외적 측면은음운론적 차원(dimension phonologique), 내적 측면은 의미의 차원(dimension du sens)을 가리킨다. 이 이원론은 영혼과 신체의 이원론과 합쳐진다. Dualisme linguistique = résultante du dualisme métaphysique. 언어에도 형식(소리)과 내용(의미)라는 언어적 이원론이 존재한다. Grammaire générative : 생성 문법이라는 창조적 차원은 언어의 외적 측면이 아니라 내적 측면에 관계한다.
(2) 표면적 구조와 심층 구조의 구별 (pas de lien nécessaire entre la structure ou la syntaxe de surface des énoncés, et leur structure profonde) : 문장의 표면적 구조(문법적 형태나 통사구조)와 그 심층 구조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언어학적 구조는 서로 다른 여러 표면 구조로 표현될 수 있다. 예컨대, "Dieu invisible a créé le monde visible"라는 문장을 보자. 주어와 속사는 암묵적 판단을 전제하고 있는 termes complexes이다. 이는 아르노와니콜에 따르면, 부수 명제(propositions indicentes)인 "Dieu est invisible"와 "le monde est visible"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한 구절에 세 개의 명제가 들어 있다. 하지만 포르루아얄 논리학에서는 이러한 변형적 차원(dimension transformationnelle)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의 동일한 형식이 여러 다른 명제를 생성해내는 능력, 즉 생성적구조의 원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촘스키가 말하는 ‘변형(transformation)’은 언어가 하나의 심층 구조(structure profonde)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심층 구조로부터 여러 표면 구조(structures de surface)를 규칙적으로 변형하여 생성할 수 있다는 뜻. John loves Mary – Mary is loved by John. He can go – Can he go ? 즉, 같은 의미 구조가 여러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언어적 생성 능력. 하지만 아르노와 니콜은 문장을 하나의 판단으로 이해하고, 위의 문장을 겉보기에는 하나의 명제처럼 보이지만, 여러 부수 명제가 들어 있는 문장으로 분석. 하나의 복합 명제를 풀어 쓰는 것. 문장이 다른 문장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생각과는 다르며, 언어의 창조적이거나 생성적인 능력을 설명하지 않음.]
[논리학의 구성]
논리학의 제1부는 개념(Conception)을 다룬다. 이것은 판단을 수반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단순한 관찰(simple vue)이다. 우리는 정신 안에 문제의 사물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1부는 논리학 전체의 기초를 이룬다. 가장 먼저 l'idée en tant qu'elle est dans l'esprit, 그리고 그 관념의 본성과 기원이 다뤄진다(챕터1.). 그 다음으로 표상된 대상이 다뤄진다. 여기에서는대상의 종류에 따라 조사를 나눠서 진행한다(챕터2.). 여기에서는 데카르트적 존재론, 즉 chose와 modes de chose를 구분하는 것이 기초를 이룬다. 그 후에, 대상들은 단순한 특성과 복합된 특성에 따라 다뤄지고(챕터5), 그 연장 (챕터6), 그리고 명석 판명함(챕터9)이 다뤄진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지시하는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Nous avons en nous l'idée de la chose que nous signifions par nos paroles. 우리는 언어 없이 사고할 수 없다. 따라서 논리학 1부는 관념들(Idées)만큼이나 말(mots)도 다룬다. 이 부분은 의미와 의미론의 토대에 관한 사유를 전개한다. Tout ça est appuyé sur une théorie du signe. 또한 언어는 오류의 근원으로서도 탐구된다. 논리학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오류를 식별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많은 챕터를 오류 문제에 할애한다.
우리는 흔히 정신 속의 관념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말에서부터 출발해 사고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idées de mots et non idées de choses). 하지만 서로 다른 화자들은 항상 같은 관념을 같은 단어에 결부시키지는 않는다. 이런 오류를 치료하는 방법은 정의를 통해 단일한 방식으로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챕터12~챕터14는 théorie de la définition이다.
또한 저자들은 관념 이론을 주요 논리적 주제에 적용하여 검토한다. 보편자와 범주 문제. 제1장의 제3챕터에서, 아르노와 니콜은 10개의 범주를 설명하고, 5개의 prédicables(보편적 술어, 일종의 보편자)를 설명한다. le genre, la différence, l'espèce, le propre ou accident propre et l'accident. Cf. Isagoge de Porphyre.
15챕터에서는 일종의 탈선적 논의(excursus)로, 저자들은 성찬 공식인 "이것이 나의 몸이다"에 대한 칼뱅주의적 해석을 반박하는 데 전념한다.
(본격 내용)
아르노와 니콜에게 ideés란 무엇인가? 이는 어려운 질문이다. 관념들은 논리학 전체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동시에 정의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그들에게 관념이란 너무 명백하여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제1부의 14챕터와, 4부를 보라. 이 주제와 관련해, 저자들은 파스칼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진술은 데카르트 이후로 '관념'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데카르트 이전에, '관념'이라는 말은 그 사용 범위가 매우 한정적이거나, 혹은 반대로 매우 포괄적이었다. 관념은 신의 정신 속에 영원이 존재하는 une forme ou un modèle을 의미했다.
16세기에는 관념이 사유 속의 사물에 대한 상이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synonyme de l'image d'une chose dans la pensée). 데카르트는 <제3성찰>에서 '관념'이라는 말을 도입한다. 그는 관념이라는 말을 '상'의 개념(그 당시 최신 용법)과 연관시켜 사용하지만, 곧 "comme l'image d'une chose" 즉, 사물의 상과 같은 것이라는 말로 수정한다. (~처럼). C'est une simple analogie, les images sont de nature corporelle (formées dans le cerveau), pas les idées.
Idée = tout ce qui est conçu immédiatement par l'esprit.
데카르트에게 관념은 정신에 의해 직접 파악되는 모든 것이다.
Hobbes = idée comme image physique, corporelle, quelque chose qui se produit dans la partie du cerveau qui a la faculté d'imagination.
하지만, 홉스에게 관념은 물리적이고 물체적인 이미지이며, 상상력을 담당하는 뇌의 부분에서 생긴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관념'이라는 용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idée = modèle dans l'esprit divin이라는 확립된 철학적 정의를 참조한다. 이 개념을 신적 차원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전이 시킨 것이다.
Arnauld와 Nicole은 image라는 말에 대한 적극적 정의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concevoir = vue des choses qui se présentent à notre esprit sans jugement.
La forme de la représentation, c'est l'idée.
그들은 관념을 forme으로도 다루고, 그 후에 내용으로도 다룬다. 두 정의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
33페이지.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 우리 안에 있는 관념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어떤 인식도 가질 수 없다. 관념은 정신과 그것이 인식하는 사물 사이의 중개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르노의 <Vraies et des fausses idées>를 참조할 수 있다. 이 저작은 Malebranche와의 논쟁의 맥락 속에서 쓰여진 것이다. 비록 <논리학>의 출판 이후에 쓰여진 것이긴 하지만, 데카르트 철학 수용의 맥락에 놓여 있다.
<2대답>의 기하학적 증명들에서 Idées 는 formes de nos pensées로 이해된다.
Forme par laquelle nous sommes conscients de ces mêmes pensées.
L'idée est un état ou une occurrence, ou quelque chose dans l'esprit qui a la réalité d'un mode de la pensée.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이 정의가 관념을 전부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L'idée se caractérise par sa dimension représentative.
La terminologie cartésienne distingue l'idée comme forme et comme contenu représenté.
<성찰>의 서문에서 관념이라는 말의 동음이의성이 지적된다.
On peut considérer l'idée materialiter ou objective.
Objective – l'idée en tant qu'elle est la chose représentée par l'opération.
Si je me représente le soleil, ma pensée est l'idée qu'on forme. = 내가 태양을 생각한다는 바로 그 정신적 행위.
Le soleil, entant qu'il est en soi, c'est l'idée prise objectivement. = 내 사유를 통해 표상된 대상.
여기에서 데카르트는 동음이의성에 대해 말한다.
Est-ce que ça veut dire qu'il y a deux sens du mot "idée" ?
1. opération de l'esprit
2. objet de la pensée
Est-ce que ça veut dire que la même entité, l'idée, possède deux dimensions ?
1. Elle est quelque chose dans mon esprit (forme)
2. un certain contenu présent à l'esprit.
말브랑슈는 진정한 동음이의성이 있다고 봤다. L'idée au sens où elle est un objet représenté n'est pas la même chose qu'en tant qu'elle est une perception de l'esprit. 즉, 표상된 것으로서의 관념과 정신의 지각은 서로 다른 것이다.
Arnauld soutient que c'est une seule entité qui contient ces deux dimensions. 아르노는 같은 존재의 두 차원이라는 점을 고수했다. En un sens, on retrouve le couple réalité formelle/objective. 이 점에서 형상적 실재성과 대상적 실재성의 구별이 다시 등장한다.
데카르트의 맥락에서 형상적 실재성과 대상적 실재성은 실재성의 정도와 관련되어 말해진다. 이는 스콜라 철학의 인과성의 원리에 의거한다. Il faut au moins autant de réalité dans la cause que dans l'effet.
[질료적으로 거짓인 관념]
Parfois, une idée n'a aucune réalité objective parce qu'elle ne représente pas une entité à proprement parler : idées matériellement fausses. Elles nous représentent bien quelque chose pourtant. 표상적 실재성이 0인 관념도 존재한다. 이것은 질료적으로 거짓인 관념이라고 불린다. 이런 것들은 그래도 무언가를 우리에게 표상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음 점에는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사물들을 그것들 자체로는 지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양, 별들, 그리고 우리 밖의 무수히 많은 사물들을 본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가서, 말하자면 하늘을 돌아다니며 그러한 모든 사물들을 직접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직접적인 대상(objet immédiat)을 통해서 본다. 예를 들어, 정신이 태양을 본다고 할 때, 그가 보는 것은 실제의 태양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친밀하게 결합된 어떤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내가 ‘관념(idé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 ‘관념’으로 내가 여기서 뜻하는 것은, “우리 정신의 직접적인 대상이거나, 혹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정신에 가장 밀접하게 닿아 그 지각(perception)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브랑슈는 관념이 la perception과도 구분되는 것이고, des corps représentés와도 구분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체는 우리의 영혼을 affecter할 수 없다. 따라서 une entité incorporelle이 필요하다. l'idée n'est ni matérielle, ni mentale, c'est une entité éternelle, necessaire, qui se situe en Dieu lui-même. 따라서 관념은 Un intermédiare représentatif entre l'esprit et les choses이다.
진리탐구 1권에서는 아직 관념이라는 말이 일반적이다. 거기에서는 관념이라는 말이 우리의 모든 지각을 포함했다. 그러나이후 점차 관념은 des perceptions de l'entendement으로 제한된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본질적 관계(des rapports essentiels)를 포함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관념을 가질 수 있다. Perceptions sensibles = sentiments qui sont des modifications de notre âme dépourvues de représentation propre. 감각적 지각은 우리 영혼의 변양일 뿐이며, 고유한 표상을 갖지 않는다.
Arnauld는 <Des vraies et des fausses idées>에서 이러한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말브랑슈가 주장한 '우리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의 관념을 통해 인식한다'라는 명제를 거부한다. 아르노는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는것이다"라고 말한다. Une chose est objectivement dans mon esprit quand je la conçois. L'idée est identique à la perception de l'esprit. Cette perception a deux rapports : (1) l'un au sujet pensant, (2) l'autre comme objet perçu qui est la perception prise "objectivement" dans mon esprit.
Solei pris objectivement : est-ce qu'une dénomination extrinsèque, ou l'idée a-t-elle une propriété en vertu de laquelle elle contient le soleil ?
이 물음에 대해 아르노는 quand il parle de l'idée comme chose objectivement dans l'esprit, il parle bien de l'idée qui possède une propriété de représentation par laquelle elle représente la choses hors de l'esprit. Conception 아르노에 따르면, 그가 정신 속에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관념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정신 밖의 사물을 표상하는 표상적 성질을 가진 관념 자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과 세계는 관념을 통해 매개되지만, l'idée n'est pas une entité intermédiaire entre l'esprit et la chose.
말브랑슈에 대한 또 다른 반론. 말브랑슈에게 지각은 명석판명한 지각밖에 없다. 하지만 아르노에게는 il y a des idées sensibles qui ont un contenu représentatif, ce ne sont pas de purs qualia. 감각은 단순한 감각질이 아니라, 어떤 자연적 내용(contenu naturel)을 가진다. 비록 이 contenu naturel이 l'idée prise objectivement et la chose elle-même 사이의 유사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르노에게는 관념의 지향성이 우선이다. L'idée n'est pas à penser comme un tableau ou une image. La représentation se rattache aux idées.
Loin que Arnauld soutienne que la signification permette de rendre compte de la représentation, c'est la représentation qui permet de rendre compte de la signification. 아르노에게는 의미작용이 표상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표상이 의미작용을 설명해주는것이다.
Question : peut-on lire la Logique à la lumière de ces textes postérieurs ? 이 후기의 입장으로 <논리학>을 읽어도 될까?
(1) 가설1: 1662년 당시 아르노와 니콜은 이 논쟁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2) 가설2: 아르노의 테제는 이미 명확했지만, 단지 그것을 체계적으로 표현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이것이 Anfray의입장)

단어, 관념, 사물 : 이것이 의미론의 토대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De interprétation>의 시작에서, 의미론의 삼각형을 제시한다. 말(les mots)은 영혼의 상태(pathémata tês psychês, πάθηματα τῆς ψυχῆς)를 상징한다.
따라서 말소리 속에 있는 것들은 영혼의 정념들(pathēmata tēs psuchēs)의 기호(sēmeia)들이다. 그리고 문자로 쓰인 것들은 말소리에 있는 것들의 기호이다. 또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들이 서로 같지 않듯이, 사용하는 말소리도 서로 같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말소리들이 처음으로 가리키는 기호들(sēmeia)의 대상인 영혼의 정념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이 정념들이 닮은 것(homoiōmata)인 사물들 또한 동일하다.
Relation des conceptions aux choses = similitudes.
Registre de la représentation (표상의 층위)
le registre sémiotique et le registre représentatif의 구분. 첫 번째는 가변적이지만, 두 번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개념의 표상적 성격은 언어적 모델에 따라 이해된다. [즉, 개념(conceptus)도 말(word)처럼 기호(signum)다. 개념도 “사물을 대신하거나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이 관계는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기호–의미 관계 (signum–significatum)와 같은 구조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개념도 하나의 ‘언어적 기호’처럼 작동한다.] 오캄에 따르면, 의미 관계는 개념의 경우 자연적인 것이지만, 말의 경우 관습적인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사유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음성들을 임의적 방식으로 관념과 연결하여, 기호를 만들고, 그것을 code처럼 작동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관념들을 물질화시켜서, 다른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게 하는 것. 언어는 rapport arbitraire entre des sons et des idées로 이해된다. 데카르트는 <세계>, <굴절광학>, <원리>에서 représentation sans ressemblance comme institution de nature qui depend d'un libre choix par Dieu를 설명한다.

Reprennent le modèle traditionnel de la signification.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은 언어의 용어를 실재와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는다. 개념이 용어를 연결하는 것은 각 화자가내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에다. 언어는 이러한 개인적인 존재자를 공적으로 만들어준다. 천사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않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médiation extérieure, physique 없이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결국, signification(의미 작용)이라는 것은 나의 사유를 직접적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일면이다. 하지만 언어는 사적인 현상이 아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다.
Q. 어떻게 표상의 성공을 보장하는가? Comment garantir le succès de la représentation ?
Q.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적인 정신 속의 표상(représentations)을 가리킨다면, 어떻게 공적인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가? Comment renvoyer à des entités publiques si le langage désigne essentiellement des entités privées ? (Des représentations dans l'esprit ?)
소통은 수신자가 해독한 생각이 발신자가 부호화한 생각과 일치할 때 성공한다.
La communication est réussie quand la pensée décodée par le récepteur correspond à celle qui est codée par l'émetteur.
만약 관념이 표상적 차원에서의 언어의 용어의 의미라면, 그들이 같은 내용의 관념들을 가질 때, 성공한다. 사유는 표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La pensée est ancrée dans le monde via la notion de représentation.
(아래에는 도식화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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